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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Jan 02. 2024

우울증 걸린 애 엄마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첫 출산은 모든 산모들에게 그렇듯 내게도 두려움이었지만 아이를 만날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출산의 고통은 배속에서 무당이 칼춤을 춰대듯 어마어마한 강도였다. 난 내심 내가 기절이라도 해서 제왕절개를 하기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자연 분산을 하여 큰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체감하지 못했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는 것을.

출산의 고통쯤이야 에빙하우스의 망각 곡선에 제대로 부합하는 기억 중의 하나이고 육아의 고생에는 비할 것이 못 된다


모유수유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나는 모유를 못 면 마치 자격 없는 엄마가 되는 산후조리원의 몹쓸 분위기에 필사적으로 나오지도 않는 젖을 짜내야만 했다. 우족 달인 물이 젖이 도는데 도움을 준다 하여 친정엄마를 볶아 마셔보기도 했다. 국물을 많이 마셔야 한대서 사발에 미역국 국물 원샷은 기본으로 해가며 그렇게 모유와의 사투를 벌였다. 하지만 인생사 뜻대로 되는 일이 왜 그리 없는지 결국 내 모유는 분출의 기쁨도 제대로 맛보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렇게 원하던 완모(완전 모유수유)를 포기하고 혼합수유 (분유와 모유를 함께 수유) 하게 되었다. 그나마 첫째는 분유를 주든 모유를 주든 잘 먹었지만 둘째는 분유를 먹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 대는 통에 그 당시 난 제대로 잠을 잔 기억이 없을 정도다. 신생아가 통 잠을 잔다는 100일의 기적도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실패한 모유수유와의 사투 덕에 난 산후조리의 의미를 아직도 이해 못 하는 여자가 되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조리라는 개념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다.


험한 세상 내 한 몸 지켜내기도 힘든 판에 건사해야 할 자식이 생긴다는 건 금덩이를 지고 산에 오르는 것 같았다. 놓칠 수도 없고 놓아서도 안 되는 귀한 것을 지키며 끝없이 올라야 하는 산을 내가 걷고 있는 것이다.


힘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8개월쯤 우울증에 걸렸다.

육아를 어떻게 거들어야 할지 모르는 남편이 었고 암에 걸린 친구 천이 있었다.


천은 아이를 낳고 백일쯤 회사 건강검진을 받던 도중 암이 발견하게 되었다.

암이 발생한 부위를 절제한 후 입원해 있던 천은 그간 연락이 되질 않아 친구들의 애를 좀 태웠었다.


병문안이랍시고 퇴원한 천의 집으로 첫째 데리고 갔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수술 후 나의 방문이 얼마나 귀찮았을지 그 당시에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안색도 창백하고 마를 대로 마른 천은 나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을뿐더러 본인이 수술 후 먹는 신선한 야채들과 과일로 만들어 단맛은 나지만 무설탕인 드레싱을 끼얹은 샐러드를 내어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갓 지은 따뜻한 쌀밥에 계란말이까지 해서 밥을 차려 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기력이 없어 입에 대지도 못하고 소파에 누워버렸다. 염치없이 맛있게 천이 차려준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지금 생각하면 눈치를 국에다 말아먹은 건지 그냥 수술도 아니고 암수술 후 퇴원하고 조리 중인 친구를 볼 거라고 애까지 데리고 갔으니..


아직도 생각하면 천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진다. 친구를 위해 본인은 힘에 겨워 먹지도 못할 식사를 차려낸 천은 다행히 그 후 건강이 회복되어 직장생활을 계속 이어 나가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 후 이제 내가 문제였다. 친구집 방문 후 난 불안했다. 아이를 두고 내가 하늘나라로 가버릴까 봐 무서웠다. 나 같은 불안을 겪는 엄마들이 종종 있다는 사실은 그 후 알게 되었다. 어쨌든 난 그렇게 걱정과 불안에 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의 병이 되었다. 내가 없으면 이 어린것이 어떻게 대접받으며 살 수 있을까 싶었고 그런 걱정들이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친정 부모님께서 딸자식을 살리고자 우리 집으로 들어오시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친정 부모님과의 합가는 무려 8년이라는 세월 동안 친정 부모님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둘째까지 출산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친정 부모님의 절대적 도움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참 힘들었다.

문제는 그 육아가 아직도 힘들다는 것이다.

아들들에게 친구같이 편안한 엄마가 되길 원했다. 같이 온라인 게임도 즐겼고 유행하는 랩도 외워 함께 불러 보며 그렇게 아들들과 함께 했다.

함께 했다기보다는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아들들에게  친구 같은 편한 엄마가  아니라 그냥 호구 같은 엄마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내 지도력이 먹히질 않는다.

아들들과의 밀당에서 완벽하게 패한 나지만 아직도 내가 아들들을 두고 빨리 하늘나라로 가버릴까 봐 걱정을 하곤 한다.

16년 전과는 다른 이유로 말이다.

난 이제 아들 1, 2호로 인해 속에서 울화통터져 죽을까 봐 걱정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럴 때마다 집구석을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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