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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살이v Sep 26. 2022

낙동강 속 용궁

회룡포를 다녀와서

기차소리가 요란하다. 오른쪽 빈자리에는 오랫동안 함께한 카메라가 검은 눈동자를 반짝인다. 곧 목적지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30여 년 만에 다시 고향 땅을 밟는다. 나는 이곳 용궁 최 대령 집 어느 셋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오랜만에 온 고향이라 그런지, 청명한 가을 하늘과 역사 양쪽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나를 반기는 듯하다. 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이지만 이곳에는 목조로 된 용이 ‘용궁역’이라는 팻말을 휘감듯이 올라가며 지키고 있다. 역사 양쪽 벽면에는 자라와 토끼의 이야기가 익살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는 어느덧 토끼가 되어 기대와 설렘을 품고 자라를 따라 푸르른 바닷속 용궁에 들어선다.

  나의 발걸음은 곧장 향석리 비룡산(飛龍山) 장안사(長安寺)로 향한다. 고려 시대 의상(義湘)의 제자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이곳에 들어서서 ‘비룡산 장안사(飛龍山長安寺)’라는 현판을 보고 있노라니, 이곳에서 불교에 귀의한 당대 시풍(詩風)을 이끌었던 고려 문인 이규보가 떠오른다. 그가 여기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번뇌(煩惱)와 외로운 나그네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하니 나 역시 뜨거운 차 한 모금을 삼켜본다.

  곧바로 예천 1경을 자랑하는 회룡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전망대에 오르니 숨 막힐 듯 밀려오는 탁 트인 경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휘돌아치는 낙동강 지류를 따라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 있고, 그 사이로 반사된 햇빛이 마치 천상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작은 마을을 품고 흐르는 내성천이 마치 용이 돌아나가는 형상이라 하여 ‘회룡포(回龍袍)’ 라 한다. 하트 모양의 두 개의 산이 탄성을 자아내는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회룡마을을 굽어 싸는 강을 따라 눈이 부시게 늘어선 모래사장 위로, 가을동화의 어린 두 주인공 은서와 준서가 보이는 듯했다.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셔터에 손을 얹고 카메라에 그림을 담아본다.

  회룡마을로 가는 길에는 ‘뿅뿅다리’ 가 있다. 물이 불어나면 다리의 철발판 구멍으로 물이 퐁퐁 솟아나 퐁퐁다리라고 불리던 것이 언론을 타고 뿅뿅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강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싼 비룡산의 자태가 전망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사뭇 엄숙하다. 아슬아슬 다리를 건너면서 시퍼런 낙동강 줄기를 이렇게나 가까이 볼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억겁의 시간 동안 자연이 만든 침식과 퇴적의 무한궤도 속에서 나는 다시 작은 아이로 태어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삼강주막(三江酒幕)이다.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한 데 만나 삼강이라 불렸다는 이곳은 조선시대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영남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넘기 전 쉬었다가 간 곳이라 그런지 들어서면서부터 고즈넉함이 묻어난다. 주막 대청 나무 뒤편에 2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회나무가 있다. 고목(古木)은 나를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젊은 선비 마냥 지긋이 내려다본다. 선비는 이 마루에 앉아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나 또한 200여 년이 지나고 나면 누군가의 과거가 돼 있을 생각을 하니 불현듯 영겁의 세월 속에 아련함이 몰려온다. 그 선비도 200여 년 전 누군가를 추억하며 200여 년 후의 나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마지막 주모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옮겨 금원마을의 황목근(黃木根) 앞에 섰다. 500여 년 된 팽나무로서 5월이면 누런 꽃을 피워 황 씨 성을 갖게 되었고 근본 있는 나무라 목근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세금도 내는 천연기념물 400호라고 한다. 옆에는 천년만년 살라는 황(黃) 씨 성을 가진 만수(萬壽)가 대를 이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금을 내는 부자(富者)인 두 부자(父子)를 마주 보고 서 있으니 더 이상 나무가 아닌 사람에게 초대된 느낌이다. 

  돌아오는 길에 뜨거운 순대 국밥을 한 그릇 시켰다. 예전 그 맛 그대로인데 주변에 알려진 덕택인지 손님만 많아졌다. 30년 만에 돌아온 이곳이, 이 내가 태어난 이 용궁이 불현듯 새롭다. 200년 아니 500년 전에도 어느 누군가의 용궁이었을 것이고 앞으로 200년 후에도 누군가의 용궁이 될 생각을 하니,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생각이 든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한 지류를 바라보며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쉴 수 있는, 그런 인생을 꿈꾼다. 스스로 만든 유희적 공상에서 허우적대는 찰나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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