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석탄박물관을 다녀와서
아버지는 광부였습니다. 당신은 진폐 요양 병동 어두운 한 구석에서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깡마른 가슴은 둥글게 만 입술을 통해 마지막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수척한 몸을 감싸던 검은 살갗은 햇빛에 그을렸는지 세월에 그을렸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함께한 석탄 낱알이 피부를 파고 들어 그렇게 보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얀 가운에 푸른 셔츠를 받쳐 입은 젊은 의사는 고인의 폐 사진을 보여주며 진폐증 말기의 만성폐쇄성호흡질환이라는 난해한 용어로 어린 나에게 사인(死因)을 이해시키려 했습니다. 복도 끝에서 흐느끼며 서 있던 어린 내 모습을 회상하던 찰나, 나의 어린 것이 다시 현실로 옷자락을 잡아 끕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은성 갱도’ 입니다. 검은 터널 입구가 나를 집어 삼키듯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갱내로 들어서니 오른쪽에는 지하로 들어가는 철로가 세월의 무게와 함께 펼쳐집니다. 말없는 그 철로는 지하 깊숙이 광부들을 이끌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느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들은 지하로 내려가면서 오늘도 무사히 다녀오라는 아낙네의 부탁을 받았을 겁니다. 철로 위에 전신된 움직이는 광부 모형은, 당시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점 없는 얼굴로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머리위로 떨어지는 검은 탄가루를 맞으며, 아버지는 무엇을 떠올리셨을까요? 내가 기억하는 광부는 탄가루에 찌든 속옷 입니다. 어머니가 손으로 거듭 문질러 비벼도 잘 지워지지 않던 검은 때. 차가운 수돗물로 헹구고 나면 하수구를 따라 흘러가던 두 줄기의 검은 얼룩이 생각납니다. 양손으로 꼭 쥐어짜 마당 앞 빨랫줄에 털어 널면 회색 빛깔의 속옷에는 햇빛을 받아 푸르스름함 마저 묻어나곤 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 역시 차디찬 검은 갱도에서 아내의 정성이 담긴 속옷의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 같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눈부십니다. 은성갱도를 포함한 병풍 같은 광산은 이제 가을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마친 모양입니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탄광 사택촌이 나옵니다. 그곳에는 어릴 적 우리네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었습니다. 대학을 가야 한다는 언니는 아랫목 책상 앞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어린 나는 아버지 앞에서 종이를 접고 있습니다. 고된 노역을 끝낸 남자 둘이 돼지고기와 소주를 목으로 넘기며 탄가루를 씻어내고 있습니다. 문경 지역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옵니다. 다소 어색한 억양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정감이 갑니다.
문경은 예전 탄광으로 성장한 도시입니다. 우리네 아버지들이 지하에서 캐낸 시커먼 석탄으로 한 가정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읍내가 이루어졌고 심지어 멀리 타국 검은 광산에서 벌어 들인 돈으로 우리나라의 현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이 풍요도 나의 현재도 모두 지하 깊이 매장되어 있던 석탄에서 시작됐을 것입니다.
문득 석탄박물관 벽에 걸려 있던 광부의 손이 떠오릅니다. 깍지 낀 끝이 둥근 두 뭉툭한 손은 서로를 마주 잡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손톱 밑과 손마디마디마다 심어져 있는 검은 줄무늬는 식솔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고단한 아비의 숙명이 배어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잡아 볼 수 없는 아버지의 손을 사진으로 보면서 한 손으로는 두 눈에 흐르는 뜨거운 것을 훔쳐 봅니다. 이제는 박물관 속 역사 속 장면으로 보여지면서, 이제는 누군가의 호기심으로 보여지면서, 이제는 먼 추억 속 한 장면으로 기억되면서 아버지는 저에게 말없이 다가왔다가 조용히 떠나십니다. 은성 갱도 밖에 물들어 있는 단풍 나무가 오늘따라 유난히 붉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