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나는 사건은 OO소프트에서 20대 직원이 투신한 것과 OO아웃렛에서 30대 매니저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다니던 직장에서 자살을 하는 경우는 아마도 직장이나 직원들의 영향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업무가 너무 힘들거나 직원들 때문에 괴로움이 큰 경우 집이 아닌 직장이 자살의 선택지(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고인을 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라리 그만두지.’
맞는 말이다. 일이 힘든 경우에도 그 직장을 그만두면 나아질 것이고, 동료 때문에 힘든 경우에도 직장을 그만두고 동료들과 멀어지면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 과연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했을까. 오죽했으면 ‘직장에서 죽기’를 선택했을까.
죽기를 선택했다는 것은 ‘막다른 낭떠러지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것’과 비슷하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막다른 낭떠러지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끼는 것, 또 하나는 삶과 죽음 중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의 이면에는 삶이 싫음, 죽음이 더 좋아 보임, 그리고 무엇인가에 대한 복수심이 저변에 깔려 있을 수 있다. 죽을 만큼 힘들어서 삶과 죽음을 50:50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직장이나 직원이 자신에게 원한을 일으킬 경우 의외로 쉽게 49:51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회사에서 죽으면 누군가에게 엿 먹일 수 있겠지?’라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생각은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도 당사자에게는 죽음과 바꿀 정도로 심각한 일이 될 수 있고, 이론적으로는 죽는 사람만 손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이익이라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는 것. 이것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일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일일 수 있다. 직장과 동료를 우습게 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