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 교수님의 퇴임으로 송별연을 했다. 한 분은 정년이 되셨고, 한 분은 명예퇴직이었다. 아마도 참석한 대부분은 그만두고 나가는 교수님이 부러웠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다들 본인이 남은 햇수를 세어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정년이 까마득하여 세어 보는 것이 무의미했다.
송별연에는 신입도 왔다. 두 명이 나가고 두 명이 들어오는 셈이다. 벌써 내 밑으로 6명이 되었다. 그렇게 계속 한 곳에 있으면 시간이 지나서 밀려 밀려 나도 정년이 되는 거겠지.
식사를 하면서 대화가 오갔다. 아니나 다를까 대화의 주제는 남의 살림 참견으로 시작되었다. 아기를 빨리 낳으라는 둥, 학교 근처로 이사 오라는 둥, 차는 전기차로 사라는 둥 살림에 도움은 전혀 되지 않는 질문과 지시의 연속이었다. 아기를 키워줄 것도 아니고, 이사비를 보태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런 얘기는 왜 하는지. 한두 번 하면 그냥 웃고 넘어가면 되는데 회식할 때마다 하니..
어쨌든. 어떤 직장이든 정년이라는 것이 있고, 모두들 정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면 정년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직장에서 나이만 들었다는 이야기다. 싫은 걸 다 참아가면서 버티고 버티고 고개를 들어 보니 벌써 60세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 아름다운 청춘을 직장에 바치고 남은 것은 퇴직금과 연금과 늙음. 나의 직장 생활이 행복하여 직장을 다니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을 누리는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정년만 바라보고 참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렇게 참아서 얻는 것이 퇴직금 몇 푼과 늙음이라면 나의 인생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퇴직을 하시는 두 분 교수님이 패를 받고 사진을 찍으면서 한 마디씩 하셨다. 한 분은 ‘지금 들어오는 신입 교수들은 변화에 적응도 해야 하고 힘들 것이다.’라며 위로의 인사를 시작으로 ‘제2의 인생 멋지게 사는 모습 보이겠다.’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한 분은 정년까지 4년이 남았는데 명예퇴직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고, 여러 가지 본인의 사정과 체력적인 면 등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렸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인 때문에 상처를 받으셨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며 끝을 맺었다. 아마도 다들 내색은 안 하지만 그간의 많은 싸움들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사정과 체력적인 면은 겉포장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재직 시절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여서 서로 헐뜯고 싸우고 편을 가르고 했겠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짧은 인생, 좋게 살아도 아쉬운데 서로를 미워하고 짓누르는 일은 본인 인생에도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떠나는 교수님이 술을 권하셨지만 나는 운전 때문에 마시지 못했다. 술을 안 마시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술을 마시면 송별을 하는 이 순간이 더 나아질까? 아마도 본인의 마음이 허해서 그러는 것이리라.
나는 아직 정년까지 교수를 할 자신이 없다. 아니, 정년까지 한 곳에 있는다는 것이 인생의 낭비라는 생각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그렇게 하니까 정년까지 있는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정년까지 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 것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다들 어쩔 수 없이 정년을 채우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들 별다른 수가 없으니 하는 거겠지. 연구에 뜻이 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사명감이 있어서 나는 꼭 이 길을 가고 싶다는 교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교수가 아니라 교사도, 공무원도, 회사원도 다들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공직이 너무 좋고, 나는 꼭 이 일을 하고 싶어서 정년까지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나는 이 회사가 너무 좋고, 지금 하는 일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정년까지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다들 먹고살기 위해서 버티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것이 슬픈 일인 것 같다. 그렇게 버티면서 정년을 해도 꽃길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질병과 외로움과 집안 문제들로 힘들어지기는 마찬가지고, 정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 슬프다. 젊을 때는 돈을 버느라 금방 지나가고, 늙으면 몸이 아파서 고통으로 지나가고. 우리가 꿈꾸었던 그런 인생은 온데간데없고, 우리의 존재라는 것은 바람결에 지나가는 먼지와도 같이 보잘것없다. 봄, 여름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나뭇잎들도 가을, 겨울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떨어지면 그뿐. 퇴임식이나 송별회라는 것도 떨어지는 나뭇잎이 슬퍼서 보기 좋게 포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슬픔이 깊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떠나는 사람을 다 같이 배웅하는 것이다. 나도 언젠가 떠나는 때가 오겠지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