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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Jan 18. 2021

과테말라로 갈 테니 그리 아세요.

안정보단 모험을 선택하다


2009년 3월쯤이었나. 친구와 함께 칙칙한 토론토 대학 카페테리아에서 피지올로지 시험공부 막판 스퍼트를 내고 있었다. 3월인데 여전히 영하 10도 안팎을 달리고 있는 토론토 날씨에 짜증이 났고, 일 년의 반 이상이 겨울인 곳에 살고 있다는 게 화가 났고, 아무리 공부를 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모든 상황이 모조리 답답했다. 


공부 진도가 나가지 않자 펜을 툭 내려놓고 옆에 있던 친구에게 선포했다.


“나 이다음에 꼭 따뜻한 나라 가서 살 거야.” 


“응. 그래. 그렇게 해.”


친구는 한번 피식 웃더니 다시 노트에 얼굴을 파묻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랏?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정말 따뜻한 나라에 가서 살 거라니까! 넌 이 기나긴 캐나다 겨울이 지겹지도 않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일 년 내내 따뜻한 곳에 가서 살 거야. 플로리다 같은데 말이야. 혹독한 겨울이 시작했다 하면 바로 뜨는 거지. 나중에 내가 플로리다에 있을 때 놀러 와!”


“으... 응. 그.. 그래. 놀러 갈게.” 


이런 뜬금없는 소리를 자주 했기에 친구는 허허 웃으며 내 얘기를 흘려듣고 다시 시험공부에 매진했다.


‘칫. 나 진짠데. 나 정말 따뜻한 나라에 가서 살 건데. 두고 봐~!’ 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피지올로지 노트를 펼쳤다. 휴.. 지겨워 죽겠는 시험공부. 끝내기만 하자! 


우울한 현실을 도피하고자 툭 내뱉은 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정확히 2년 후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과테말라에 국제 학교 선생님으로 가게 된 것이다. 교대에 있을 때 무조건 토론토만 벗어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여러 국제 학교에 지원했었고, 신기하게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인 과테말라에서만 연락이 왔다. 


‘과테말라? 과테말라가 뭐야? 말아먹는 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유치한 말장난이 생각날 정도로 과테말라라는 나라에 대해, 아니 멕시코를 제외한 중남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국 땅에서 새롭게 펼쳐질 삶에 대한 기대로 마음은 요동쳤다. 인생 처음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지금이라면 두세 번 생각하고 또 고민했을 테지만 그때 내 마음은 과테말라에 가야 한다고,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영화 <타짜>의 곽철용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묻고 더블로 가~!”라고 했을 때만큼의 확신이었다. 


과테말라로 가즈아~!


과테말라에 간다고 하자 예상했던 부모님의 반대와 부딪혔다. 


“엄마, 나 과테말라 학교에서 오퍼 받았어. “


“과테말라? 위험한데 아니야? 그런데 가서 뭐하려고. 다른 데 알아봐.” 


“아니, 여기 분위기가 좋아. 인터뷰했을 때 느낌이 가장 좋았어. 이미 간다고 구두계약까지 했어.” 


“...” 


일방적인 통보에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는 엄마를 설득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핸드폰 너머로 공기가 급격히 바뀌는 게 느껴졌다. 아빠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것이다. 우르르 쾅쾅. 예상치 못한 딸의 통보가 아빠의 혈압을 깊은 웅덩이로 부터 끌어올렸다. 


“너 지금 과테말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긴 알고 가는 거냐? 위험순위가 전 세계 상위권에 드는 나라라고. 그런 곳에 여자 혼자 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우리랑 상의 한마디 없이 결정을 내려! 이게 무슨 자다가 일어나서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몇 개월도 아니고 2년씩이나 가는 거라면서. 제정신이야! 지금 당장 구두계약 해지해. 당.장.!”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어려운 아빠인데 이런 말을 하려니 어디서부터 어떤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나를 굉장히 원해 인터뷰 그 자리에서 곧바로 오퍼를 주었다는 사실, 과테말라를 상징하는 걱정 인형까지 주며 우리 학교로 꼭 왔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던 교장의 모습, 학교에서 제시한 조건과 과테말라의 이점, 이 모든 것을 설명드리고 싶었으나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로 따발총 같은 설교를 파바박 퍼붓는 아빠 앞에서 난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딸이었는데 무슨 말을 해도 고리타분하게 마음을 바꾸지 않는 내가 답답하셨는지, 전화기 너머로 두 분의 화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도 별 어려움 없이 취업을 하게 된 딸을 자랑스러워하시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가지고 아빠의 설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나라는 사람이 사회에 인정받는 기쁜 순간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고 싶었으니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의 기관총은 멈추지 않았다. 연신 날아오는 총알에 오히려 내 결심은 더 곧게 섰고 흔들리지 않는 내 모습에 답답하셨는지 아빠는 결국 화산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해는 했지만 내 의견은 안중에도 없는 부모님에게 섭섭했다. 뭘 해도 화산이 쉬이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또박또박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확고했다. 


“과테말라로 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딸깍. 


짧은 최후통첩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났다. 위험한 건 알겠는데 굳이 그렇게 화를 내실 필요가 있을까. 좀 잘했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내 토라진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부모님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전까지 차디찬 냉전은 몇 주동안 지속되었다. 


부모님 뿐만이 아니었다. 친했던 친구 한 명과 당시 주인집 독일 할머니의 열렬한 지지 빼고는 모두 다 반대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토론토에서 직장을 찾아 더 빨리 정착하는 게 훨씬 좋은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당시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도 있었기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표면적으로는 더 옳은 판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소리치고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외침이었다. 타인이 날 믿어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믿어줘야지. 젊은 날의 패기는 내 마음에 불을 활활 지폈고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와 전 남자 친구의 서운한 마음을 뒤로하고 결국 난, 떠나기로 했다. 인생 처음으로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결정을 내린 순간이었다.




내 마음에 영원히 아름답게 남을 과테말라. Que maravillosa!


학교의 제안을 받은 후 다음날,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교장에게 당당히 걸어갔다. 그녀와 힘차게 악수할 때, 나는 이미 암묵적인 확답을 주었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펜을 꺼내 학교 계약서에 내 인생 2년을 싸인했다. 


자신있게 휘갈겨 쓴 싸인과 함께 내 삶은 중대한 전환점을 돌았고 나는 미스 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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