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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Dec 07. 2020

제가 잘 못 가르쳤습니다.

3년 반 만에 복직을 해서 5학년을 맡았다.

첫날부터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와 우리 반 담임이 누구인지 묻더니, 내 이름을 말하자

"에잇! 또 여선생이야!"

라며 전화를 끊는 학부모가 있었다.


낯선 환경,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 새벽 출근길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 나와 우는 아들, 고속도로를 긴장 속에서 운전하며 뭉친 근육.


 출근한 지 보름쯤 지났을 때 연구실에서 복도 맨 끝에 있는 교실로 돌아가며 나는 사표 쓸 생각을 했다. 일하는 것보다 집에서 아내와 엄마로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항상 내 편인 남편은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이란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 해 참 많은 소동이 있었다. 절에 다니시며 신년 운세를 보는 우리 엄마는,

"스님이 올해 온갖 사람들이 다 너를 괴롭힌다고 하니 사람들을 조심해. 이상한 사람 만나도 너무 상처 받지 말고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라고 말씀하셨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은 착하고 예뻤다. 하지만, 무리를 지어 있으면 변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랬다. 무리 짓기 특성이 비교적 약한 남학생들도 우리 반 아이들은 뭉쳐 다녔다. 11명 모두가 방과 후에 밖에 따로 만나 시간을 보냈다. 그만큼 아이들 사이가 돈독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함께 다니면서 갈등도 커졌다. 소리 없이 쌓이는 갈등은 반 분위기를 위축시켰다.


오래 쉬었다 온 후 나는 아이들 반응을 눈치 빠르게 읽어내지 못했다. 왜 우리 반에는 이렇게 힘든 아이들이 많을까? 하며 다른 반과 비교하기 바빴다.


정효는 남자그룹의 중심이었다. 성격이 무척 밝아서 튀는 행동을 곧잘 했다. 하지만 막상 끼를 펼칠 멍석을 깔아주면 급 소심해졌다. 수업은 거의 듣지 않을 정도로 산만했다. 끊임없이 말을 했고, 절친들에게 참여를 강요했다. 정효가 있는 주변은 늘 시끄러웠다.




급식을 먹은 후 내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정효는 교실에 남아있던 잔반 중 나물을 갑자기 천장에 던져 붙였다. 부추 무침 같은 것이었는데 아이들은 초록에 심심한 맛이 나는 나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나물은 잔뜩 남아있었고, 정효와 친구들은 천장에 나물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교실로 돌아왔을 때 교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천장에서 진득하게 붙어있다가 툭툭 떨어지는 나물 줄기를 피하며 거의 울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정효와 남자아이들은 맨손으로 여전히 나물 올려붙이기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열두 살짜리 남자애의 놀이라고 보기에도 너무 철없고 못된 장난이었다. 음식으로 장난하면 안 된다는 일장연설을 하고 빗자루와 걸레를 연결해 얼룩진 천장을 전부 정리하게 했다.

정효는 비슷한 수위의 장난을 쳐서 나에게 자주 혼났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학교로 돌아온 나는 전처럼 매섭게 화를 내는 선생이 되지 못했다. 늘 집에 가기 전에는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했고 가정에도 전화드리고 어머님과 소통하려 애썼다.




그 해 도덕 시간은 여름에 퇴직을 앞두신 선배님께서 전담해주셨다.

아빠가 퇴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나는 그 선배님을 뵐 때마다 아빠의 마지막 출근길을 보는 느낌이 들어 인사를 할 때도 자리에 멈춰서 정중하게 했다. 그렇게 여러 달 인사하다 보니 40년 넘게 근무하신 선배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도덕 시간이 끝나 교실로  돌아가 보면 선배님이 남기신 판서가 남아있었다. 곧게 쓰인 글씨들이 선배님의 오랜 교직 생활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교직 초반에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아마 나는 선배님의 판서에서 나의 마지막 교단 생활을 나름 상상해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효에게 도덕 시간은 장난을 쳐도 되는 시간이었다. 담임 수업 시간에도 몹시 산만했던 아이다.

할아버지 선생님이 꼿꼿하게 판서를 하고 계시는 그 시간은 아이의 장난 스위치를 마구 누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덕 수업이 끝날 즈음 천천히 교실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얼굴이 벌게지셔서 말씀도 제대로 못 잇는 선배님이 정효를 복도에서 혼내고 계셨다.

하지만, 녀석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선배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걸음에 뛰어 달려갔다. 선배님께 자초지종을 들었다.


선배님이 판서하시는 동안 정효는 몰래 교실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선배님 뒤를 따라다니며 선생님의 동작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했다. 아이들은 모두 웃고 난리가 났다. 뒤늦게 정효의 행동을 알아챈 선배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다. 나긋하게 훈계하시고 말았던 분이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아이들을 자습시켜놓고 복도에서 아이를 혼내고 계셨다.


선배님은 자조적으로 "내가 마지막 해에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네." 하셨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상황에서도 자기 잘못을 모르고 뻣뻣하게 서 있는 녀석의 태도가 내가 잘못 가르친 쳐서 인 것 같아서 부끄럽고 민망했다. 녀석의 옆에 서서 나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사과드렸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아이를 잘 못 가르쳤습니다."


눈물 흘리며 사과하는 내 모습에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울 것 까진 없었는데 글쎄 그때 내 마음은 너무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아이는 이게 뭐라고 담임선생님이 눈물까지 흘리지? 하는 어벙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신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선배님은 당황하시는 한편 정중한 내 태도에 마음이 좀 풀리신 것 같았다.


방과 후에 정효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효는 어차피 이 사건이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또 기나긴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 네가 한 장난은 어떤 선생님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 있을만한 장난이었고, 마음을 다해 사과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이는 순순히 내일까지 편지를 써와서 제대로 반성하고 선생님께 사과드리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정효는 부모님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바른 글씨로 장문의 편지를 써 왔다.

나는 정효와 함께 선배님이 계시는 교실로 내려가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편지를 전했다.

선배님은 정효의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여름이 지나고 선배님이 퇴직하시는 날.

선배님이 우리 교실로 찾아오셨다.


"선생님,  아이가 잘못했던 거 선생님 잘못이 아닙니다. 눈물 흘리며 사과해주어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감동이었어요. 우리 아내가 선생님께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요."

하며 악수를 청하셨다.


선배님의 마지막 퇴근길이 외롭지 않아서 다행이다. 상처보다 감동을 안고 가셔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정효는 지금 연기수업을 받고 있다. 정효의 어머님은 지금 내게 가끔 정효의 소식을 전해주신다. 유난히 튀었던 아이. 그 아이를 언젠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만날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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