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말로는 못해볼 아이를 만나곤 한다. 나는 촌철살인 같은 류의 말을 즉석에서 잘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말을 못 하는 편도 아니다. 조곤조곤한 내 말 습관을 잘 따라주는 누군가를 만나기만 한다면 꽤 멋진 말로 상대를 감복시킬 수 있다. 문제는 대상이 아이였을 경우 통하지 않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그런 아이를 두 명 딱 만났다.
두 명 다 우리 반 학생은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어떤 믿음이나 호감이 없는 상태에서 나는 그 애의 잘못된 점을 고쳐주려 하고 했고 아이는 그것을 튕겨냈다.
100년도 넘은 나무가 있던 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가을 운동회를 거창하게 치른 날이었다. 운동회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한 달 전부터 내내 이 날을 위해 연습시키고 준비했던 시간이었다. 드디어 끝나가고 있구먼. 홀가분한 기분 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지. 하며 긴장이 덜 풀린 마음 반으로 운동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모래를 앞 친구에게 뿌리는 아이를 발견했다.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얘! 그거 하지 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무심히 모래를 던지던 아이는 내 말에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말대꾸를 시작했다.
"왜요?
""모래 던지면 앞에 애가 다 맞잖아. 눈에라도 들어가면 다치지."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아야지!"
"지금 다치지도 않았잖아요."
"안 다쳐도 안 했으면 좋겠는데?"
"뭔데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세요?"
여기서부터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눈을 치켜뜨는 모양새가 전혀 수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학교 교사고 너에게 이런 행동 못하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설명을 시작했다. 아이는 다 듣지도 않고 표독스럽게 받아쳤다.
"저한테는 선생님 아닌데요? 왜 잔소리세요?"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아이는 처음이었다. 말의 논리를 떠나서 이미 기세에 밀렸다. 아이는 무섭게 침착했고 나는 계속 밀린다는 생각과 아이를 누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흥분하고 있었다. 아이는 귀신같이 내 두려움을 눈치챘다. 그리고 어버버하고 있는 내 상태를 보고는 자리를 떴다.
만국기가 어지럽게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쓰레기를 줍기 대회라도 시작한 듯 노랑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일제히 등을 숙이고 휴지들을 줍기 시작했다. 노란 거북등이 물결치는 듯한 모습에 잠깐 어지럼증이 일어났다.
회의 시간에 이 학생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이렇게 얘기하지 그랬느냐, 는 식으로 대처할만한 말들을 알려주셨다. 하지만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동학년엔 키가 185센티미터 정도 되고 부리부리한 젊은 남자 선생님이 있었다. 그는 아이들과 무척 친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이들을 잘 잡기도 했다. 나는 그가 몹시 부러웠다. 그는 이런 일 따윈 겪지 않겠지. 무례하고 앞 뒤 못 재는 아이를 못 누른 것이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내가 아직 어리고 내공이 없는 교사여서 그래. 아이가 나를 얕잡아 봐서 그래.라고 생각했다.
6년 후 비슷한 일을 또 겪었다.
옆 반의 아이였다. 평소 인사도 잘하고 나름 얼굴을 익혀 친하게 지낸 아이였다. 그 애가 우리 교실로 찾아왔다. 체육 시간에 있었던 피구 시합 판정에 항의하러 온 것이었다. 내가 우리 반에 유리한 판정을 해서 자기네가 졌다며 따지러 온 것이라 했다.
"경기 전에 선생님이 분명히 말했어. 판정에 불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라고.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으로 경기 진행을 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겐 불리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결국 모두에게 같은 기준인 거라고. 경기 끝난 후엔 승복하고 마무리 짓는 거라고도 말했지."
"선생님이 뭔데요?"
단순히 경기의 내용에 대한 항의였다면 내 나름의 이유를 설명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화는 싸우자는 식 밖에 안된다. 나는 아이와 몇 마디 더 하다가 예전 '그 아이' 생각이 났다. 답이 없었던 그저 싸우려 드는 아이와의 대치.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 하자. 너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
그리고 아이의 담임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이의 담임은 대노하여 아이를 불러들여 지도했다. 딴에는 억울해하며 눈물 흘리는 자기 반 아이들을 대신한 투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고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선생님께 무례하게 대든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쳤다고 했다. 평소 신뢰 형성이 됐던 사이라 그랬는지 아이는 담임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잘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이가 우리 교실로 찾아왔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속상해서 그랬어요."
아이의 눈을 보았다. 전혀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담임에게 전해 들은 말속의 반성한 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아이가 그냥 돌아갔다. 아이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그 아이를 봐도 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 작은 아이를 상대로 그리했다.
지금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 날 그 아이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은 것을.
대가 센 아이가 우리 교실까지 찾아와 사과하는 일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예전 기억까지 더해지며 이를 악물고 그 애를 밀어냈다. 유치하지만 그게 나름 내 복수라고 생각했었던 것도 같다. 나는 씨알로 안 먹혔지만 제 담임에게는 술술 반성을 말한 아이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꽤 많은 아이들을 만나며 겨우 2명의 반항아를 만났을 뿐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대부분 나의 말을 잘 들어주고 따라주었었다. '교사의 권위'가 내게는 참 중요한 문제구나 싶다. 카리스마가 없는 교사가 되어 교실붕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도 있다. 반에 한 두 명씩 있는 '엄석대'를 사로잡지 못한다면 1년이 힘들어지는 건 사실이다. 안정을 최고로 치는 내게 종종 선을 넘는 아이들은 너무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 카리스마를 갈고닦아 기르며 기세 등등하게 살기 싫다.
아이는 '나'에게 대든 것이 아니다. '교사'에게 대든 것이다. 나는 '내'가 상처 받지 않고 '교사'의 일을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뭔지, '무엇을 도와주면' 되는지 감정의 동요 없이 아이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