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의도대로 살아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누군가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내 마음조차 내 멋대로 할 수 없다. 더 성숙하자 성숙하자 되뇌이지만 하루 아침에 내가 바뀌는 것 같지는 않다. 이기적이었던 내 모습을,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도 하고, 다독여보기도 하고, 정신차리라고 말도 해보지만 사랑해야지라는 말이 허망하게 들렸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내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말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 말이 삶에서 실행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오늘 오후, 아주 갑자기 내가 가진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소나기를 맞은 듯,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은 듯, 기분좋게 하는 사람을 길에서 만난 듯 말이다.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든데 그냥 갑자기 그랬다.
사실 최근 부모님 집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이제 남은 건 가족 밖에 없어, 서로를 소중히 여겨요."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그 말 영향일까. 티격태격하는 부모님에게 서로 말으로도 소중히 아껴주자는 말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나에게도 포함되는 말이었고. 애당초 서로 긍정적으로 진심어린 말을 해주는 데에는 미숙한 탓에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말 표현은 하지 못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여기까지만 말해둔다.
옛날 글들을 읽어보니 나는 어렸을 적 상처에 대한 자기연민으로 둘러 싸인 사람 같았다. 뭐 어느 정도 요인은 있겠지만 심한 가정폭력이나 인격을 무시당할 정도의 경험은 아니다. 그래서 최근에 현재의 나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내 마음대로 조작(?) 및 편집을 했던 것으로 결론을 냈다(!).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했던 건 나를 포함해서 나의 물건, 나의 주위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시작한 어느 시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요근래 나의 유일한 낙이 생겼다. 그것은 책을 사는 일이다. 읽고 싶은 책들을 사서 책장에 꽂으면서 기분이 좋다. 책을 들고 집에 오는 길도, 오는 길에 책을 좀 넘겨 그 안을 들여다보는 일도, 언제든 원할 때 꺼내서 생각나면 읽어보는 일도 너무 좋다. 심지어 처음으로 책 저자를 찾아가 사인을 받기도 했던 것! 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사고, 그것을 소중히 내 책장에 분류하여 꽂아두고, 그것을 지키는 일들을 해보고 산 일이 드물다. (무언가 나를 위해 사는 일을 있어도 마음이 바뀌거나 상황상 계속 가지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오랜 기간 동안 크든 작든 내 영역이라는 것은 없었고, 내 영역을 '남'에게 침범하도록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걸까. 작지만 나에게 유의미한 일들을 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일까. 잠시 수업 준비를 하러 까페에 가서 나는 언니에게 선물 받은 컴퓨터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잘 넣고, 이틀 전 산 책들도 가방에 구겨지지 않게 잘 넣어 하는 일들이 마치 처음해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할 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내가 있는 까페로 와서 팥빙수를 함께 먹었다. 나를 태어날 때부터 사랑해주고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독립을 물론 목표로 하고 있지만, 그냥 그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 존재가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떤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 갑자기 어느 날 그랬다. 물론 의식적으로 나는 왜 내 주위 사람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을까, 왜 그러지 못할까 자책같은 의문들이 머릿 속을 맴돌 때가 있었지만 오늘부터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게 시간은 그냥 흘렀고,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질문의 시작은 답으로 가는 길인걸까. 내일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이 나이고 인간이지만. 오늘은 그렇다. 오늘은 오늘에게, 내일은 내일에게만 맡기기로 하고 또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