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넬로의 발자취 2

장미의 이름, 기호, 바르트, 퍼스, 데리다, 역설, 딜레마, 패러독스

by 사유의 풍경

3. 이름, 존재, 그리고 기호의 역설


우리가 어떤 존재를 부를 때, 우리는 그 존재를 정말 ‘붙잡는’ 것일까?


‘이름’은 언제나 친숙하다. 이름을 부르면 친구가 돌아보고, 이름을 적으면 기억이 남는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름이란 것이 정작 그 존재 자체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름은 단지 표지일 뿐, 그 뒤편의 존재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기호학이라는 학문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기호는 무엇인가? 기호는 어떻게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기호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가? 이 물음은 단순한 언어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와 부재, 진실과 허구를 가르는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장미”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장미를 소환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이름일 뿐, 향기나 촉감은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문장에서 쓴 것처럼,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윤기 번역)

원문 라틴어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를 직역하면
"예전의 장미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덧없는 이름들을 가진다"

- Stat: 서 있다, 존재하다 (3인칭 단수 현재형)
- rosa: 장미 (주격 단수)
- pristina: 예전의, 본래의 (여성 주격 단수 형용사)
- nomine: 이름으로, 이름에 있어서 (탈격 단수)
- nomina: 이름들 (주격 복수)
- nuda: 벌거벗은, 덧없는 (중성 복수 주격 형용사)
- tenemus: 우리는 가지고 있다 (1인칭 복수 현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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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브루넬로의 삼중 변주:

시대를 가로지르는 기호


내 첫 번째 가설은 ‘브루넬로’(Brunello 또는 Burnellus)라는 이름을 따라 세 편의 문학작품을 횡단하는 것이다.

하나는 중세 영국 수도사 나이젤 와이레커의 풍자시 『Speculum Stultorum』

또 하나는 계몽주의 시대 볼테르의 철학소설 『자딕』

마지막으로는 위 두 작품을 그 속에 품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거장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 세 작품은 전혀 다른 시대와 장르에서 태어났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브루넬로’라는 이름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각각의 세계 안에서, 존재와 기호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진리를 미끄러뜨리며, 주체를 조롱한다.


‘브루넬로’는 단순한 말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기호가 존재를 대신하려 할 때 벌어지는 균열의 상징이고(Speculum Stultorum), 해석이 권력과 충돌할 때 터져 나오는 아이러니이며(자딕), 결국 이름만 남고 실재는 사라지는 우리 시대의 메타포다(장미의 이름).


특히 주목할 점은, 현대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기호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짜 뉴스'와 '딥페이크' 시대에 우리는 이름과 존재의 괴리, 기호와 실재의 미끄러짐을 그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경험하고 있다. 브루넬로의 여정은 이러한 현대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기호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3.2 기호학적 틀: 기호와 존재의 변증법


이 글은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세 가지 주요 기호학적 이론을 분석틀로 삼는다. 지금은 다소 생소하더라도 끝까지 읽고 이 부분을 다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퍼스(좌), 데리다(중), 바르트(우), 출처: wikimedia

첫째, 바르트(Roland Barthes)의 자기기호화(self-signification) 이론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기호는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주체를 구성하는 데 참여한다. 이름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권력관계 속에서 그 대상을 규정하고 제한한다. 중세의 『Speculum Stultorum』에서 브루넬루스의 이름은 주체를 포획하는 기호의 권력을 보여준다.


둘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귀추(abduction) 개념이다. 퍼스는 연역과 귀납에 더해 귀추를 제3의 추론 방식으로 제시했다. 귀추란 관찰된 현상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흔적으로부터 실재를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자딕』에서 브루넬로는 귀추적 추론의 대상이 되며, 이는 실재와 기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한다. 자세한 건 아래 1화 참고.


셋째,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차연(différance)과 흔적(trace) 개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의미는 기호들 간의 '차이'와 시간적 '지연' 속에서 끊임없이 미뤄진다. 모든 기호는 다른 기호를 참조할 뿐, 절대적 의미나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아래 차연 설명). 포스트모던 시대의 『장미의 이름』에서 브루넬로는 이제 허무한 기호로 남아, 실재의 부재와 이름의 공허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글은 아래 세 가지를 묻는다.


1. 이름은 존재를 붙잡을 수 있는가?

2. 기호를 해석하는 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인가, 아니면 오히려 더 큰 오해를 불러오는가?

3. 우리는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브루넬로’를 따라가는 이 여정은, 기호학, 존재론, 그리고 문학이 얽히고 풀리는 한 편의 미로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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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흔적(trace)’과 ‘차연(différance)’ 개념

우리는 흔히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지금 이 순간, 이 단어가 바로 의미를 전달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장미”라고 말하면, 장미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렇게 묻는다. “정말 그럴까?”

“장미”라는 말은 그 순간 완벽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라, 사실은 수많은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différence), 그리고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속 지연(deferral)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장미’는 다른 종류의 ‘꽃’과 ‘풀’과 ‘가시’와 ‘붉음’ 같은 수많은 다른 개념들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의미를 얻는다. 또한, ‘장미’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전에 들었던 수많은 ‘장미’의 이미지, 경험, 문화적 기억들, 즉, 이미 지나간 ‘흔적들’을 끌어와서 의미를 구성한다.

즉, 의미란 지금 여기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흔적들'과, 아직 '오지 않은 의미 가능성들' 속에 미뤄져 있다. 데리다는 이 구조를 ‘흔적(trace)’과 '지연(deferral)'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 ‘차이(différence)’와 ‘지연(deferral)’을 합쳐서 차연(différa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따라서 ‘차연(différance)’은 차이와 지연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고, 차연 때문에 의미는 항상 흔들리고 미루어진다.

4. 중세의 거울 『Speculum Stultorum』

이름은 우리를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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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줄거리 개관:

꼬리를 늘리고자 떠난 당나귀


『Speculum Stultorum』은 12세기 영국 수도사 나이젤 와이레커가 쓴 풍자시로, 한 마리 당나귀 브루넬루스(Brunellus)가 주인공이다.


브루넬루스는 자신의 짧은 꼬리에 불만을 품고, 더 긴 꼬리를 갖고자 여행을 떠난다. 의사를 찾고, 파리로 가서 문법과 논리를 배우고, 로마로 올라가 수도회를 세우려 하지만, 그의 모든 노력은 조롱과 실패로 끝난다.


작품은 시작부터 그의 비극을 예고한다. 브루넬루스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그의 한계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Brunellus’는 라틴어로 ‘어두운 색의 작은 것’를 뜻한다 — 어리석고 하찮은 존재.

우리 식으로 말하면 검둥이. 검둥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를 리더로 모실 수 있겠는가?


그는 파리에서
문법과 논리를 배우려 했으나,
당나귀의 귀는 여전히 길고 두툼했다.


이 한 문장은 그의 모든 여정의 귀결을 함축한다. 아무리 인간의 지식을 쌓으려 해도, 당나귀의 본질은 지워지지 않는다.


4.2 ‘Brunellus’라는 이름:

기호가 주체를 정의할 때


브루넬루스가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히 무능해서가 아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Brunellus’라는 기호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름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다. 이름은 사회가 한 존재에게 부여하는 선험적 의미망이다.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세계는 그 존재를 특정한 틀 안에 가둔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말했다.


이름은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기호망 안에 붙든다.


브루넬루스는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지만, 그의 이름은 모든 노력을 무효화한다. 그는 말하는 당나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MBTI라는 기호'로 주체를 기호망 안에 붙들려는 현상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한번 낙인찍은 타인의 MBTI의 틀에 맞게 타인의 행동을 해석하고 끼워 맞춘다. 즉, 한번 낙인찍히면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의 행동은 MBTI 유형에 따른 특성에 맞춰서 해석된다.


4.3 자기기호화된 주체: 기호 안에 갇힌 자아


브루넬루스는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했다. 파리에서 학문을 배우고, 로마로 올라가 교회 개혁을 꿈꾼다. 그러나 그의 모든 언어, 사고, 꿈은 이미 ‘어두운 색의 작은 당나귀’, ‘검둥이’라는 기호 안에서 작동한다.


이 구조는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흔적(trace)’ 개념과 닮아 있다.


흔적(trace)은, 존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언어와 기호망 속에 흔적처럼 새겨진 것을 말한다. 주체는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남겨진 흔적들 — 사회적 기호들 — 에 의해 결정된다.


브루넬루스는 바로 그런 존재다. 그는 스스로를 새롭게 쓰려 하지만, 그가 쓰는 언어, 꿈꾸는 방향, 나아가는 길 모두가 이미 이름에 새겨진 조롱과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꼬리를 길게 하려 했으나,
세상은 그가 짧은 꼬리의 당나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이 문장은, 주체가 스스로를 초월하려 해도, 기호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중세적 운명론을 웅변한다.


4.4 풍자와 기호의 전복: 해석의 패러디


『Speculum Stultorum』은 단순한 실패담이 아니다. 이 작품은 자기기호화(self-signification)의 한계를 풍자하는 메타 텍스트다.


브루넬루스는 스스로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행위는, 독자에게는 처음부터 하나의 거대한 조롱으로 읽힌다. 그가 논리학을 공부할 때도, 그가 수도회를 꿈꿀 때도, 그는 인간이 아니라, 여전히 ‘말하는 당나귀’, ‘검둥이’로만 존재한다.


이 구조는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기호 자의성 이론과 맞닿아 있다. 기호(이름)는 자의적이지만, 일단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 의미는 견고하고 변화하기 어렵다.


브루넬루스가 아무리 학문을 쌓아도, 그 이름이 지닌 조롱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


결국 『Speculum Stultorum』은 보여준다. 기호를 초월하려는 모든 시도는, 기호의 내부에서 패러디되고 전복된다.


4.5 장미의 이름 안『Speculum Stultorum』: 일품의 골계미


장미의 이름에는 에코의 명품 골계미가 있다. 『Speculum Stultorum』 그 자체도 풍자시지만, 이 작품과 수도사 호르헤의 입을 통해 에코는 다시 한번 명품 풍자를 한다.


해당 대목을 살펴보자.

『Speculum stultorum (바보들의 거울)」에 보면, 당나귀 브루넬로가, 한밤중에 부는 바람이 수도사들이 덮고 자던 담요를 홀랑 걷어 버리면 수도사들은 저마다 사타구니를 내려다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할까, 하고 궁금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주위에 있던 수도사들이 와락 웃음을 터뜨렸다. 호르헤는 서슬이 시퍼렇게 호령했다. 「당신은 지금 내 수도원 대중들을 얼간이의 축제로 인도하고 있구려! 내 일찍부터, 프란체스코 수도회에는 이따위 얼빠진 객담으로 대중의 환심을 사는 못된 풍조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남의 수도원에서 이렇게 방자할 수는 없소.

이런 속임수에 대해, 내 당신네 수도회 목회자로부터 들었던 말 한마디를 들려 드리리다.
“Tum podex carmen extulit horridulum”
호르헤의 호통은 누구의 눈에도 지나친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라틴어 문구 “Tum podex carmen extulit horridulum”은 이윤기 선생은 아주 우아하게 “그때 사타구니에서 무시무시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라고 했지만, 직역하면 “그때 항문이 약간 끔찍한 노래(시)를 터뜨렸다”는 뜻이다.

Tum(그때), podex(항문), carmen(노래/시), extulit(노래를 하다/터뜨렸다), horridulum(horridus(끔찍한)의 축소형)

방귀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문장인데, 아주 고급스럽게 라틴어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윌리엄 수도사! 방귀 뿌~~~웅

(방귀대장 뿡뿡이가 생각난다)


『Speculum stultorum (바보들의 거울)」에서 한밤 중 수도사들의 사타구니 풍자도 신랄하지만, 에코가 호르헤의 입을 빌어 근엄한 라틴어라는 기호로 “방귀 뿡”을 표현하는 ‘위트’도 일품이다.


정말이지 일품 방귀다.

장미의 이름 호르헤 신부의 실제 모델인 아르헨티나 시인,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아르헨티나 국립도서 관장(1955~1973), 출처: wikimedia)

4.6 요약: 중세, 기호가 존재를 압도한 시대


『Speculum Stultorum』은 이름이 존재를 결정하던 시대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이름은 해방이 아니라, 족쇄다.

학문과 종교는 초월의 길이 아니라, 기호에 갇힌 또 하나의 덫이다.

존재는 스스로를 정의하기 전에, 이미 조롱의 언어로 포획된다.


브루넬루스는 스스로를 바꾸려는 의지를 갖춘 존재였지만, 그는 이미 이름 속에서 사라져 버린 존재였다.


5. 계몽의 추론

『자딕』 — 귀추하는 자, 억압당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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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자딕: 흔적만으로 진실을 추론한 남자


볼테르(Voltaire)의 『자딕』(Zadig)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 소설이다. 1747년 출간된 이 작품은 이성과 관찰을 통한 진리 추구라는 계몽주의 이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한계를 예리하게 드러낸다.


주인공 자딕은 탁월한 이성과 합리성을 지닌 인물로, 사라진 개와 잃어버린 말 — ‘브루넬로’ — 의 모습을, 직접 본 적도 없이 주변에 남은 흔적만으로 정확히 추론해 낸다. 이는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수도원이 잃어버린 말 브루넬로의 모습과 이름을 맞추는 과정과 거의 흡사하다.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철저한 관찰과 논리적 귀추를 통한 과학적 방법론의 승리를 의미한다.


소설 속 중요한 장면을 살펴보자. 자딕은 왕의 사라진 개와 여왕의 분실된 말(브루넬로)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폐하의 말은 키가 매우 작고, 발굽이 작으며, 꼬리가 5자 길이이며, 재갈 장식은 23캐럿 금으로 만들어졌고, 발굽에는 11캐럿 은이 박혀 있습니다."

왕은 놀라며 물었다. "내 말을 어디서 보았는가?"

자딕은 대답했다. "폐하, 저는 결코 그 말을 본 적이 없으며,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딕은 이어서 자신이 어떻게 그런 정확한 추론에 도달했는지 설명한다. 그는 숲 속을 산책하다가 모래 위의 발자국과 나뭇가지에 남은 흔적들을 보고, 키가 작은 말이 꼬리로 흔적을 남기며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한 나뭇가지에 붙은 금가루와 돌에 묻은 은 자국을 통해 재갈과 발굽의 특성까지 정확히 유추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추론 능력은 오히려 그를 도둑으로 오해받게 하고, 결국 감옥에 갇히는 운명에 이르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딕은 자신의 과학적 방법론의 승리로 인해 처벌 받게 된 것이다.


이 짧은 에피소드는 『자딕』 전체를 꿰뚫는 주제를 드러낸다.

추론을 통한 진실의 재구성이
오히려 체제의 오해와
억압을 부른다는 역설.

5.2 귀추적 추론:

보지 않고도 존재를 구성하다


자딕의 방법은 19세기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체계화한 귀추(abduction)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퍼스 이전에 볼테르가 이러한 추론 방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귀추란 관찰된 단서들로부터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잠정적으로 끌어내는 추론 방식으로, 연역(deduction)이나 귀납(induction)과는 다른 제3의 추론법이다. 퍼스의 귀추 구조를 자딕의 사례에 적용해 보면:


1. 놀라운 사실: 특정한 발자국, 털, 나뭇가지 흔적이 관찰된다.

2. 만약: 이런 특징을 가진 말이 있었다면, 이러한 흔적이 당연히 생길 것이다.

3. 따라서: 그러한 특징을 가진 말이 존재했다고 잠정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는 에코의 4단계 귀추법 구조에서는 과소 부호화된 귀추법(undercoded abduction)에 해당하고, 자딕은 이 구조를 정확히 수행한다(1화 참고). 그는 직접 본 적이 없음에도, 흔적이라는 지표적 기호(indexical sign)만으로 사라진 실재를 재구성해낸다. 브루넬로는 그런 식으로, 그의 정신 속에서 '추론된 존재'로 탄생한다.


이는 기호학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다. 중세의 『Speculum Stultorum』에서 브루넬루스가 이름에 갇힌 존재였다면, 『자딕』의 브루넬로는 흔적을 통해 정신적으로 구성된 존재다. 이는 계몽주의가 가져온 인식론적 변화를 상징한다

신의 질서에서 인간 이성의 질서로의 전환

5.3 귀추와 체제의 충돌:

해석자는 왜 위험한가


그런데 자딕이 실재를 정확히 재구성하는 순간, 왕과 귀족들은 그를 '도둑'으로 몰아붙인다. 이 역설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계몽주의의 핵심적 딜레마를 드러낸다.


왜 정확한 해석은 체제에 위험한 것일까?


중세의 신학적 세계관에서는 '신이 보증하는 질서'만이 진실로 여겨졌다. 자연 현상과 사회 질서는 모두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자딕은 신의 권위나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읽어낸다.


볼테르는 자딕의 이야기를 통해 계몽주의의 딜레마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성을 통한 진리 추구가 종교적·정치적 권위와 충돌할 때, 진리를 발견한 자는 체제의 적으로 간주된다. 자딕이 체제의 공식적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흔적을 읽었다는 사실은, 권력의 언어적 독점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소설 속에서 자딕은 이렇게 말한다:

진실을 보는 자는,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벌을 받는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진실을 두려워한다.


이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볼테르 자신의 경험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계몽주의적 저술로 인해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고 영국으로 망명한 경험이 있었다. 『자딕』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리와 권력의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5.4 브루넬로라는 이름: 존재 없는 실재


『자딕』에서 브루넬로는 독특한 기호학적 위치를 차지한다. 자딕이 추론하는 말의 이름은 브루넬로(Brunello)이다. 그는 이 말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발자국과 털이라는 '지표(index)'만으로 브루넬로를 구성해 낸다.


퍼스의 기호학적 삼분법(icon, index, symbol)에 따르면, 자딕이 활용한 것은 지표(index)적 기호다. 지표는 대상과 인과적 관계를 맺는 기호로, 연기가 불을 가리키고, 발자국이 지나간 사람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자딕은 이러한 지표적 기호들을 통해 브루넬로의 존재를 추론해 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브루넬로가 기호학적 실재라는 것이다:


자딕은 브루넬로를 직접 보지 않았다. 그러나 흔적을 통해 브루넬로의 특성을 정확히 재구성했다. 따라서 브루넬로는 물리적으로 부재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현존한다.


자딕은 존재를 보지 않고도, 기호를 통해 실재를 '소환'한 셈이다. 이는 중세의 신학적 명명법(이름이 존재에 선행하는)과 달리, 경험과 관찰에 기초한 계몽주의적 방법론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제는, 이 소환이 사회적으로 불신받고, 심지어 범죄로 오해된다는 것이다. 자딕의 추론 능력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만든다. 볼테르는 이를 통해, 진리 추구가 가져오는 사회적 위험과 계몽주의의 역설을 드러낸다.


5.5 『Speculum Stultorum』과의 비교:

이름과 귀추의 대조


『Speculum Stultorum』의 브루넬루스와 『자딕』의 브루넬로를 비교하면, 두 시대의 기호학적 패러다임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Speculum Stultorum』의 브루넬루스는 이름 자체에 갇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은 당나귀'로 규정되어, 그 이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중세의 기호학적 실재론(nominalism)을 반영한다.

이름이 존재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관념


반면, 『자딕』의 브루넬로는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석을 통해 구성된다. 이는 계몽주의의 경험론(empiricism)을 반영한다.

관찰과 추론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신념

두 브루넬로 사이에는 이런 중요한 기호학적 차이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둘 모두, 결국은 기호에 의해 규정되거나 오해받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브루넬루스는 이름에 갇혔고, 브루넬로는 추론에 갇혔다. 어느 쪽도 기호의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5.6 귀추의 현대적 의미:

셜록 홈즈에서 인공지능까지


자딕의 귀추 방법론은 현대 문화와 과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자딕의 직계 후손이라 할 수 있으며, 현대의 법의학과 진단의학, 나아가 인공지능의 패턴 인식까지 모두 귀추적 추론을 근간으로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현대 인공지능의 '기계 학습'이 자딕의 귀추적 방법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AI는 데이터의 패턴을 분석하여 '보지 않은' 사례에 대한 추론을 수행한다. 그러나 자딕이 그랬듯, AI의 추론도 때로는 사회적 오해와 윤리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는 『자딕』이 단순한 계몽주의 우화가 아니라, 현대 기술사회의 인식론적 딜레마를 예견한 작품임을 보여준다. 흔적으로부터 실재를 구성하는 과정은,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권력과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5.7 요약: 귀추하는 자, 체제에 의해 억압받다


『자딕』은 계몽주의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기호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 귀추적 해석은 실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

- 그러나 체제는 통제 밖의 해석을 신뢰하지 않고 억압

- 존재는 기호(흔적)를 통해 소환되지만, 권력은 그 소환을 제한

-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행위가 됨


자딕은 진리를 찾으려 했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벌을 받는 운명을 살아야 했다. 그가 추론했던 브루넬로는, 결국 체제에 의해 오염된 기호로 전락한다.


이것이 『자딕』이 단순한 계몽주의 낙관론을 넘어, 권력과 진리의 갈등이라는 더 복잡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다. 브루넬로라는 기호는 이제 단순한 동물의 이름을 넘어,

진리 추구의 가능성과
그 정치적 위험을 상징하는
복합적 의미망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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