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넬로의 발자취 3

기호, 허무, 해석, 장미의 이름, 에코

by 사유의 풍경

6. 허무의 미궁: 『장미의 이름』

해석의 허무

이 이미지는 장하(章廈)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AI 도구를 사용하여 생성되었습니다. CC BY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6.1 줄거리 개관: 장미의 이름만 남기고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1980)은 14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는 그의 제자 아드소와 함께 사건을 추적하고, 수도원의 미로 같은 도서관을 조사하며, 숨겨진 금서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 를 찾아낸다.


시학 제2권은 ‘웃음’을 긍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교회 체제는 웃음을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해 금지했다. 결국,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수도원은 불타고, 남는 것은 오직 이름뿐이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과거의 장미는 이름만을 남기고, 우리는 벌거벗은 이름만을 쥘 뿐이다.”


이 마지막 문장은, 『장미의 이름』 전체를 꿰뚫는 주제 —기호는 진리를 가리키지 못하고, 이름만 남는다 — 를 상징한다.



6.2 브루넬로의 흔적:

기호 위에 기호가 겹칠 때


『장미의 이름』 초반, 윌리엄은 수도원에서 사라진 말의 이름 '브루넬로(Brunellus)'를 알아맞힌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이름이 단순히 말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미 다른 텍스트 — 중세 풍자시 『Speculum Stultorum』의 당나귀 브루넬루스(Burnellus) — 에서 차용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브루넬로’라는 이름은

말을 지시하고 (1차 기호)

중세 텍스트를 참조하며 (2차 기호)

더 나아가 웃음과 패러디의 의미망까지 덧붙인다 (3차 기호).


기호 위에 기호가 덧씌워진다.

이제 기호가 더 이상 단순히 대상을 가리키지 않고, 해석의 미궁으로 빠져든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독자들을 탐사추적에 나서게 한다.



6.3 도서관의 미로: 과잉기호의 세계


수도원의 도서관은 단순한 책 창고가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미로 같은 구조

책 위에 책, 이름 위에 이름을 덧씌운 분류 체계

언어 장벽과 숨겨진 코드

윌리엄은 사건의 단서를 따라가지만, 갈수록 진실은 멀어지고, 기호만이 남는다.

이곳은 기호들이 서로를 참조하면서 의미를 은폐하는 장소다.

흔적의 모양이 그 혼적을 남긴 몸의 모양과 늘 같은 것은 아니고, 또 흔적이라는 것이 꼭 몸의 무게에 의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때로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마음에다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관념은 만물의 기호요, 형상은 기호의 기호, 관념의 기호인 것이다.

— 장미의 이름,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22 특별합본판 540면(윌리엄 수도사의 말)


에코는 이 구조를 통해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 개념을 문학적으로 재현한다. 의미는 끊임없이 미뤄지고, 우리가 손에 쥐는 것은 해석의 잔해뿐이다.



6.4 해석의 실패:

모든 추론은 허무로 끝난다


윌리엄은 사건을 추리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살인의 열쇠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결국 밝혀진 것은 모든 살인 사건이 계획된 것이 아니라, 우연과 공포, 오해의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즉, 처음부터 존재했던 거대한 음모 따위는 없었다.


내 지혜라는 것은 어디로 갔느냐?
나는 가상의 질서만 좇으며
죽자고 그것만 고집했다.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나.....

이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 장미의 이름,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22 특별합본판 825면(윌리엄 수도사의 말)


『장미의 이름』은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기호를 해석하려 해도, 세계는 무의미와 우연 속에서 흘러간다. 윌리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 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 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깐 말이다.

Er muoz gelichesame die leiter abwerfen,
sô er an irufgestigen
(지붕에 올라가면 사다리는 치우는 법)


— 장미의 이름, 에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22 특별합본판 825면(윌리엄 수도사의 말)

마지막 문장은 중세 고지 독일어(Mittelhochdeutsch, Middle High German)로 쓰인 문장이다. 현대 독일어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약 11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사용된 독일어의 한 형태다.

이는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6.54절의 유명한 비유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떤 진리를 깨닫기 위해 사용한 논리나 언어도, 그 목적을 달성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위키설명).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6.54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적이다. 나를 이해하는 자는 결국 이 명제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가 이 명제들을 사다리처럼 사용해 올라간 뒤, 그 너머를 보게 되면 말이다(그는 사다리를 올라탄 후 그것을 버려야 한다).”

(영어 번역)
My propositions serve as elucidations in the following way: anyone who understands me eventually recognizes them as nonsensical, when he has used them—as steps—to climb beyond them. (He must, so to speak, throw away the ladder after he has climbed up it.)
He must transcend these propositions, and then he will see the world aright.]

(독일어 원문)
Meine Sätze erläutern dadurch, dass sie der, welcher mich versteht, am Ende als unsinnig erkennt, wenn er durch sie – auf ihnen – über sie hinausgestiegen ist. (Er muss sozusagen die Leiter wegwerfen, nachdem er auf ihr hinaufgestiegen ist.)
Er muss diese Sätze überwinden, dann sieht er die Welt richtig.


『장미의 이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기호의 의미가 끊임없이 미뤄지고 미끄러지는 '차연'의 과정이다. 윌리엄이 추적하는 진리는 계속해서 다른 기호로 대체되고, 최종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6.5 브루넬로의 변주: 『Speculum

Stultorum』에서 『장미의 이름』까지


『Speculum Stultorum』의 브루넬루스는 태어날 때부터 조롱을 위한 이름을 지녔다.


『자딕』의 브루넬로는 흔적을 통해 재구성된 존재였다.


『장미의 이름』의 브루넬로는 기호 그 자체가 무너지는 세계를 상징한다.


이렇게 세 작품은 브루넬로를 따라, 기호와 존재의 비극적 궤적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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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요약: 이름만 남고, 장미는 사라진다


『장미의 이름』은 기호 해석의 종말을 보여준다.

기호는 더 이상 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해석은 무의미의 미로 속에서 헤맨다.

남는 것은 이름뿐이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이 문장을 통해 에코는 선언한다. 장미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벌거벗은 이름뿐이다.


우리는 기호를 읽으며 살아가지만, 그 기호 너머에 존재했던 무언가는 이미 없는지도 모른다.



7. 브루넬로의 삼중 변주: 이름, 추론,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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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이름이 부르는 세 가지 운명


브루넬로(Brunello 또는 Brunellus)라는 이름 하나가, 중세, 계몽, 포스트모던을 가로지르는 세 편의 문학 속에서, 서로 다른 기호학적 운명을 만들어낸다.

『Speculum Stultorum』에서는 주체를 조롱하고,

『자딕』에서는 가설적 추리의 대상이 되며,

『장미의 이름』에서는 이름만 남고 진실은 사라진다.

하나의 이름, 세 번의 변주, 그리고 하나의 귀결


기호는 결국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7.2 첫 번째 변주:

이름에 갇힌 자 — 『Speculum Stultorum』


브루넬루스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두운 색의 작은 당나귀’라는 조롱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는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지만, 이름은 그의 모든 꿈과 시도를 조롱한다.

그는 긴 꼬리를 원했으나,
세상의 웃음은
꼬리보다 더 빠르게 자라났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지시 기호가 아니다. 이름은 주체를 선행해 규정하고, 존재를 가능성 이전에 고정한다.


브루넬루스(검둥이)는 이름이라는 거울 속에서 자신을 끝없이 오인하며 살아간다. 이 첫 번째 브루넬로는, 기호가 주체를 포획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7.3 두 번째 변주:

존재를 가설적 추리하는 자 — 『자딕』


자딕은 브루넬로라는 존재를 본 적이 없다. 그는 발자국과 털, 흔적만을 보고 사라진 말을 정확히 추론해 낸다. 이것은 귀추(abduction), 특히 과소부호화된 귀추(undercoded abduction), 즉 단서를 모아 가장 개연성 높은 실재를 추론하는 능력이다.


나는 보지 않고도 보았노라.


하지만 이 능력은 체제에게는 위협이었다. 자딕은 도둑으로 몰리고, 고통받는다. 『자딕』의 브루넬로는 존재가 기호를 통해 재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해석은 체제에 의해 억압된다.


두 번째 브루넬로는, 기호와 해석, 권력의 충돌을 상징한다.



7.4 세 번째 변주:

이름만 남은 허무 —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도사는 수도원의 모든 기호들 — 단서, 책, 미로 — 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아무런 진실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장미는 사라지고, 이름만이 남는다)


세 번째 브루넬로는, 기호가 무너지고 의미가 지연되는(différance) 세계를 상징한다.



7.5 브루넬로의 삼중 구조: 기호의 운명


이 세 작품에서 브루넬로를 통해 나타나는 기호학적 구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브루넬로는, 처음에는 조롱의 이름이었고, 그다음에는 가설적 추리의 대상이었으며, 마지막에는 허무한 껍데기로 남았다.



7.6 정리

기호는 존재를 감당하지 못한다.


브루넬로의 세 번의 변주는 말해준다.

이름은 주체를 억압할 수 있다.

해석은 권력과 충돌할 수 있다.

기호는 의미를 끝내 담보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기호를 해석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항상 흔적, 그리고 이름만 남은 공허다.


‘브루넬로’라는 이름은, 기호가 어떻게 존재를 꿈꾸고, 또 어떻게 존재를 배신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적 장치다.


결국 우리는 벌거벗은 이름들만을 쥔 채, 사라진 실재를 더듬으며 살아간다.



8. 마무리:

이름은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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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이름, 존재, 그리고 끝없는 미끄러짐


우리는 세상을 이름 붙이며 이해하려 한다. "장미"라 부르면 장미가 오고, "브루넬로"라 부르면 사라진 말이 나타날 줄 알았다.


하지만 『Speculum Stultorum』, 『자딕』, 『장미의 이름』 — 이 세 편의 문학은 냉정하게 말한다.


이름은 존재를 붙잡지 못한다.


브루넬루스는 이름 때문에 조롱받았고, 브루넬로는 가설적 추리로 재구성되었으나 체제에 억압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이름만 남고, 실재는 사라졌다. 이름은 존재를 소환하는 주문이 아니었다. 이름은 오히려 존재를 오해하고, 억압하고, 끝내 붕괴시켰다.


이러한 기호와 존재의 불일치는 단순한 문학적 주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근본적 조건이다. 우리의 정체성, 지식, 관계모두 이름과 기호를 통해 매개되지만, 그 기호는 결코 실재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 조건의 비극적 측면이다.



8.2 기호의 삼중 운명: 포획, 억압, 공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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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넬로라는 하나의 이름은 세 가지 기호학적 운명을 보여준다.


1. 포획 — 이름은 주체를 결정하고, 조롱한다. (『Speculum Stultorum』) 브루넬루스는 자신의 이름이 정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중세의 명목론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2. 억압 — 해석은 실재를 추론하지만, 체제에 의해 공격당한다. (『자딕』) 브루넬로는 흔적을 통해 정확히 재구성되지만, 그 해석은 권력에 위협이 된다. 이는 계몽주의적 방법론과 권력의 갈등을 보여준다.


3. 공허 — 해석은 허무 속으로 미끄러지고, 이름만 남는다. (『장미의 이름』) 브루넬로는 이제 텅 빈 기호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의 상징이 된다. 이는 포스트모던의 기호학적 허무주의를 반영한다.


이 삼중 변주는 단순한 문학적 우연이 아니라, 기호와 존재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변화해 온 궤적을 보여준다. 우리는 기호를 통해 세계를 읽으려 하지만, 기호는 언제나 우리를 어긋나게 만든다.



8.3 존재는 기호에 선행할 수 있는가?


데리다(Derrida)는 말했다.


의미는 차이와 지연 속에서만 발생한다.


존재는 기호 이전에 순수하게 현존할 수 없고, 언제나 기호의 흔적 속에서만 드러난다.


브루넬로도 마찬가지다.


그는 결코 순수한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름으로 규정되었고,

가설적 추리로 복원되었고,

해석 실패로 증발했다(물론 증발은 제목인 '장미'의 이름으로 묘사된다).


브루넬로는 실재라기보다, ‘기호가 만들어낸 하나의 서사적 흔적(trace)’이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심화된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기호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의미는 오히려 희석되었다.


현대의 정체성은 『Speculum Stultorum』의 브루넬루스보다 더 철저하게 기호에 포획되어 있다. 우리의 공적 이미지와 페북, 인스타그램 등 SNS상의 페르소나, MBTI를 통해 범주화된 페르소나는 우리 자신이면서도 우리가 아니다.


『자딕』의 브루넬로가 흔적으로 추론된 것처럼, 현대의 해석 체계는 우리가 남긴 SNS상의 흔적, MBTI분류를 통해 우리를 재구성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장미의 이름』의 허무처럼, 기표와 기의의 연결은 완전히 임의적이 되어, 기호의 의미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사회의 정보 조작과 진실의 상대화 현상은 브루넬로의 현대적 변주라 할 수 있다. 기호는 더 이상 진실의 담보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희석시키고 붕괴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호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기호들이 가리키는 실재는 그 어느 때보다 멀어졌다.



8.4 기호는 항상 실재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복제하는 세계를 만들어내는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 1981)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파헤쳤다.

Jean Baudrillard, 출처: wikimedia

그에 따르면 기호는 역사적으로 네 단계를 거친다:


1. 기호가 깊은 실재를 반영하는 단계

2. 기호가 실재를 왜곡하고 감추는 단계

3. 기호가 실재의 부재를 감추는 단계

4. 기호가 어떤 실재와도 관계없이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되는 단계


현대 사회는 네 번째 단계, “원본 없는 복제품”, “실재 없는 이미지”, 즉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상태에 도달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Speculum Stultorum』, 『자딕』, 『장미의 이름』 속 브루넬로의 여정은 이 시뮬라크르의 진행 과정을 문학적으로 예시한다:

•『Speculum Stultorum』의 브루넬루스:

이름(기호)과 실재(당나귀)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있었지만, 이미 그 관계는 조롱과 왜곡의 대상이 되었다. → 2단계.


『자딕』과 『장미의 이름』의 브루넬로:

실재는 사라지고, 남은 흔적(index)을 통해 겨우 재구성된다. → 3단계.


『장미의 이름』의 장미:

소설의 마지막, “과거의 장미는 이름만 남는다”는 선언에 이르면, 실재가 완전히 소멸하고, 이름(기호)만 남은 4단계 시뮬라크르 상태에 도달한다. → 4단계.


현대 사회에서는 이 시뮬라크르의 논리가 극대화된다. 소셜 미디어의 프로필, 가상현실 아바타, 디지털 화폐, 인플루언서 이미지들은 모두 실재를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호들 간의 네트워크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특히 정보 조작, 가짜 뉴스, 딥페이크는 더 이상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진실 자체가 사라진 상태, 진실의 시뮬라크르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에코가 남긴 말:


우리는 벌거벗은 이름만을 쥘 뿐이다.


는 단순한 허무의 탄식이 아니다.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꿰뚫는 기호학적 통찰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름을 통해 실재에 닿으려 하지만, 그 이름들은 이미 다른 이름들만을 가리키는, 끝없는 기호의 거울방 속에 갇혀 있다.


브루넬로의 비극은 곧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기호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기호로 인해 실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8.5 이름을 쥔 우리,

사라진 존재를 더듬는 자들


『장미의 이름』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진실을 직면한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과거의 장미는 이름만을 남기고, 우리는 벌거벗은 이름만을 쥘 뿐이다.”


우리는 이름을 쥔다. 하지만 그 이름은, 이미 사라진 실재의 텅 빈 반향일 뿐이다. 우리는 브루넬로를 부르고, 장미를 부르지만, 남는 것은 공명만, 흔적만, 그림자만이다.



8.6 마지막 메모: 기호, 존재, 그리고 인간


세 작품에서 브루넬로가 겪는 기호학적 변천사는 단순한 문학사적 흐름을 넘어, 인간 존재와 기호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름과 기호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소통하는 필수적 매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름은 결코 우리 존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것이 『Speculum Stultorum』의 브루넬루스가 실패하고, 『자딕』의 자딕이 억압당하며,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이 허무를 깨닫는 이유다. 기호는 존재에 접근하는 유일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존재를 온전히 포착하는 데 실패하는 매개체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 과잉, 진실의 상대화, 그리고 기호의 자기 참조적 체계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루넬로의 삼중 변주'는 단순한 학문적 분석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 의미와 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면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이름을 통해 소통해야 한다. 기호의 미끄러짐을 알면서도 기호를 통해 의미를 구성해야 한다. 이것이 브루넬로의 비극이자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이며,


결국 인간이 언어와 기호의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기호의 한계 속에서도 의미 있는 소통을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


브루넬로라는 이름을 따라 걷는 이 1차 여정은, 기호학적 탐구이면서, 결국은 인간 존재의 조건에 대한 슬픈 서사였다.


우리는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름 너머에 있던,

사라진 것들을 끝없이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브루넬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진정한 여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던
기호의 귀환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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