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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웬디 Jul 15. 2024

기꺼이 과정이 되기

in process of becoming

내가 맡아서 하는 일이 있었다. 직업적으로 말고. 어느 공동체에서 자원해서 도맡은 일. 다른 사람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일이면서도 나에겐 관심 영역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잘 마무리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그런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다. 처음엔 시간적 여유가 있어 많은 시간을 쏟았다가 나중엔 하루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쯤을 겨우 내가며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하루나 이틀쯤이면 마무리할 수 있겠다고 희망적인 생각은 품을 즈음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다시 여러 날-적어도 열흘 이상은 필요할 만큼의 과제가 더해졌다. 심지어 그냥 시간만으로는 제대로 끝낼 수 없는 상태였다. 더해진 과제들을 포함하여 내가 처음에 꿈꾸었던 상태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선 시간도 시간이지만 단지 시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힘과 비용이 추가로 더 필요했다. 물론 그냥 시간만 사용할 수도 있었다. '제대로' 말고 '그럭저럭' 끝낼 거라면.


마무리를 불과 하루 이틀 남긴 시점에 나는 모든 것을 멈추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그 일이 생각나 괴로웠지만 나는 더 이상 그 곳에 가지 않았다. 내가 자원한 일이었기에 강요도 없었다. 관련된 분들(강요하지 않고 기다려주시는)을 만날 때마다 민망하고 죄송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내 발은 그 곳에 가지질 않았다.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은 매일 나를 더 강력하게 괴롭혔지만 나는 더욱 강력하게 거부하며 그저 괴로워하기만 했다. 바보스러운 시간은 그 때 그 열흘을 우습게 넘기고 한 달과 두 달도 넘기더니 넉 달을 돌파했다. 뭐지, 이건.


뭐라 설명될 수 없는 이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나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 나는 어느 만큼 잘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살고 있었다. 적어도 평균 이상은 한다고 생각하는 일만. 고사하다가 수락하는 일마저도 사실은 내심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일이었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은 혹시라도 엮일까, 그래서 들통날까 근처에도 가지 않고 살고 있었다. 요리가 그랬고 운동이 그랬다.


엄마는 어릴 적 나에게 시집 가면 평생할텐데 지금은 하지 말라며 살림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다 큰 딸에게 온갖 음식들을 해다가 뒷바라지하시는 엄마의 사랑 방식이었다. 그래서(그 덕도 그 탓도 아니) 나는 요리를 해본 적 없이 자랐다. 언젠가 중학교 가정 숙제로 김치볶음밥을 해서 보고서를 낸 적이 있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그 즈음 얼마 동안에는 몇 번 김치볶음밥을 해서 먹은 적도 있었지만 곧 그치고 잊혀졌다. 자취 한 번 한 적 없이 대학 시절엔 기숙사에 살다가 그 후로는 다시 엄마아빠의 집에 살았고 결혼을 했다.


결혼했을 때에도 나는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아이를 먹이는 일이 생존과 직결이 되니 어쩔 수 없이 이유식을 만들었다. 나름 열심히 만들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 밥을 먹게 되고 점차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게 되자 조금씩 조금씩 다시 요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되돌아갔다.


못하니까 안 했다.


요리를 수련한 경험도 없는데다 손까지 느린 나는 요리를 한답시고 왔다갔다하다보면 한 두 시간은 훌쩍 지나는데, 상에 올라오는 건 기껏해야 국 하나에 반찬 하나였다. 그럴 때면은 꼭, 이럴 거면 안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아예 시도를 안한 건 아니었다. 반성하고 자책하다 다시 시도해 본 것도 꽤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좀 우스운 실력이지만 하다 보면 늘 거라는 건강한 생각에 이르지 못하고 나는 재차 포기를 선택해왔다. 못하니까 안 할래. 사먹는 게 더 싸. 더 맛있어.


운동도 그렇다. 나는 운동을 정말 못했기 때문에 운동으로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손에 꼽는다. 그것도 딱 두 손가락에.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서 발야구 규칙을 칠판에 열심히 설명하시더니 운동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든 물로 바닥에 큰 사각형을 그리고 발야구 경기가 시작됐다. 열 살 인생 아마도 우리 모두의 첫 발야구였을 거다. 어느덧 내 차례가 다가왔다. 있는 힘껏 공을 뻥 찼지만 공은 멀리가지 못했고 그럼에도 일단 나는 선생님이 설명하신 대로 1루를 향해 달렸다. 웬만하면 아웃이 되었을 상황이지만 수비수가 던져준 공을 1루수가 놓치는 바람에 공이 1루수 뒤로 또르르 굴러가고 있었다. 조금 전 교실에서 선생님이 공이 빠지면 더 가도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1루를 밟고 방향을 바꿔 2루까지 열심히 뛰었다. 발야구가 처음이라 아이들도 우왕좌왕 했던 탓인지 나는 2루에 세이프했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잘 판단했다고 칭찬해주셨다. 두 번째는 6학년 때다. 어찌된 일인지 운동 못하는 내가 줄넘기만큼은 꽤 잘했는데, 학급에서의 기록이 좋아 반 대표로 학년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발야구 때와 같은 특정인의 특별한 은 기억나는 게 없지만 내 스스로 나도 잘하는 체육 분야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의아하면서도 좋았던 것 같다.


딱 그 두 장면을 빼면 나는 평생을 늘 운동 못하는 애였다. 내가 운동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설픈 내 모습이 먼저 그려지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면 그들은 날 응원해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웃음거리가 될까봐 미리 두려웠다. 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평생 운동을 안하고 살았다. 나이가 드니 이제는 여기저기가 아프다. 거북목에 라운드 숄더, 뻣뻣한 관절... 다 내가 자한 일이다.


운동 못하고 요리 못하는 사람이 어떠한 과정 없이 잘하 될 리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뚜벅뚜벅 과정 속으로 걸어가보려고 한다. 여전히 나는 어릴 적 아이와 같이 두렵고 이 모든 상황을 피하고 싶기도 하지만, 마주해서 겪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결과에 다다를 방법이 없다. 니, 다른 결과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마주한 나는 회피하는 나와 분명 다를 것임을 안다.


마흔을 코앞에 두고 나에게 주는 인생 미션.

두려워도 용감하게, 기꺼이 과정이 되기.












칼 로저스

인본주의 심리학/인간중심상담

<On Becoming a Person>

in process of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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