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맡아서 하는 일이 있었다. 직업적으로 말고. 어느 공동체에서 자원해서 도맡은 일. 다른 사람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일이면서도 나에겐 관심 영역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잘 마무리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그런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해보겠다고 했다. 처음엔 시간적 여유가 있어 많은 시간을 쏟았다가 나중엔 하루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쯤을 겨우 내가며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하루나 이틀쯤이면 마무리할 수 있겠다고 희망적인 생각은 품을 즈음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다시 여러 날-적어도 열흘 이상은 필요할 만큼의 과제가 더해졌다. 심지어 그냥 시간만으로는 제대로 끝낼 수 없는 상태였다. 더해진 과제들을 포함하여 내가 처음에 꿈꾸었던 상태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선 시간도 시간이지만 단지 시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힘과 비용이 추가로 더 필요했다. 물론 그냥 시간만 사용할 수도 있었다.'제대로' 말고 '그럭저럭' 끝낼 거라면.
마무리를 불과 하루 이틀 남긴 시점에 나는 모든 것을 멈추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그 일이 생각나 괴로웠지만 나는 더 이상 그 곳에 가지 않았다. 내가 자원한 일이었기에 강요도 없었다. 관련된 분들(강요하지 않고 기다려주시는)을 만날 때마다 민망하고 죄송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내 발은 그 곳에 가지질 않았다.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은 매일 나를 더 강력하게 괴롭혔지만 나는 더욱 강력하게 거부하며 그저 괴로워하기만 했다. 바보스러운 시간은 그 때 그 열흘을 우습게 넘기고 한 달과 두 달도 넘기더니 넉 달을 돌파했다. 뭐지, 이건.
뭐라 설명될 수 없는 이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나는 또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 나는 어느 만큼 잘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살고 있었다. 적어도 평균 이상은 한다고 생각하는 일만. 고사하다가 수락하는 일마저도 사실은 내심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일이었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은 혹시라도 엮일까, 그래서 들통날까 근처에도 가지 않고 살고 있었다. 요리가 그랬고 운동이 그랬다.
엄마는 어릴 적 나에게 시집 가면 평생할텐데 지금은 하지 말라며 살림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다 큰 딸에게 온갖 음식들을 해다가 뒷바라지하시는 엄마의 사랑 방식이었다. 그래서(그 덕도 그 탓도 아니다) 나는 요리를 해본 적 없이 자랐다. 언젠가 중학교 가정 숙제로 김치볶음밥을 해서 보고서를 낸 적이 있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그 즈음 얼마 동안에는 몇 번 김치볶음밥을 해서 먹은 적도 있었지만 곧 그치고 잊혀졌다. 자취 한 번 한 적 없이 대학 시절엔 기숙사에 살다가 그 후로는 다시 엄마아빠의 집에 살았고 결혼을 했다.
결혼했을 때에도 나는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아이를 먹이는 일이 생존과 직결이 되니 어쩔 수 없이 이유식을 만들었다. 나름 열심히 만들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 밥을 먹게 되고 점차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게 되자 조금씩 조금씩 다시 요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되돌아갔다.
못하니까 안 했다.
요리를 수련한 경험도 없는데다 손까지 느린 나는 요리를 한답시고 왔다갔다하다보면 한 두 시간은 훌쩍 지나는데, 상에 올라오는 건 기껏해야 국 하나에 반찬 하나였다. 그럴 때면은 꼭, 이럴 거면 안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아예 시도를 안한 건 아니었다. 반성하고 자책하다 다시 시도해 본 것도 꽤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좀 우스운 실력이지만 하다 보면 늘 거라는 건강한 생각에 이르지 못하고 나는 재차 포기를 선택해왔다. 못하니까 안 할래. 사먹는 게 더 싸. 더 맛있어.
운동도 그렇다. 나는 운동을 정말 못했기 때문에 운동으로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손에 꼽는다. 그것도 딱 두 손가락에.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께서 발야구 규칙을 칠판에 열심히 설명하시더니 운동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나가셨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든 물로 바닥에 큰 사각형을 그리고 발야구 경기가 시작됐다. 열 살 인생 아마도 우리 모두의 첫 발야구였을 거다. 어느덧 내 차례가 다가왔다. 있는 힘껏 공을 뻥 찼지만 공은 멀리가지 못했고 그럼에도 일단 나는 선생님이 설명하신 대로 1루를 향해 달렸다. 웬만하면 아웃이 되었을 상황이지만 수비수가 던져준 공을 1루수가 놓치는 바람에 공이 1루수 뒤로 또르르 굴러가고 있었다. 조금 전 교실에서 선생님이 공이 빠지면 더 가도 된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1루를 밟고 방향을 바꿔 2루까지 열심히 뛰었다. 발야구가 처음이라 아이들도 우왕좌왕 했던 탓인지 나는 2루에 세이프했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잘 판단했다고 칭찬해주셨다. 두 번째는 6학년 때다. 어찌된 일인지 운동 못하는 내가 줄넘기만큼은 꽤 잘했는데, 학급에서의 기록이 좋아 반 대표로 학년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발야구 때와 같은 특정인의 특별한 말은 기억나는 게 없지만 내 스스로 나도 잘하는 체육 분야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의아하면서도 좋았던 것 같다.
딱 그 두 장면을 빼면 나는 평생을 늘 운동 못하는 애였다. 내가 운동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설픈 내 모습이 먼저 그려지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면 그들은 날 응원해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웃음거리가 될까봐 미리 두려웠다.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평생 운동을 안하고 살았다. 나이가 드니 이제는여기저기가 다 아프다. 거북목에 라운드 숄더, 뻣뻣한 관절...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운동 못하고 요리 못하는 사람이 어떠한 과정 없이 잘하게 될 리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그래서 나는 이제 뚜벅뚜벅 과정 속으로 걸어가보려고 한다. 여전히 나는 어릴 적 그 아이와 같이 두렵고 이 모든 상황을 피하고 싶기도 하지만, 마주해서 겪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결과에 다다를 방법이 없다. 아니, 다른 결과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마주한 나는 회피하는 나와 분명 다를 것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