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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웬디 Aug 21. 2024

불안에 대하여 1

아이가 아플 때

아이가 열이 나고 그 열이 쉬이 내리지 않으면 눈꺼풀이 무거워질 무렵 나는 티비를 켠다. 작정하고 티비를 보겠다는 결심이다. 철없는 엄마? 아니. 아이가 아픈 줄을 모르고 자게 될까봐 불안해서 그렇다.


나는 잠귀가 어둡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런 나를 두고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었다. 대학교에서 어느 식당을 빌려 엠티를 했을 때, 숙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온돌방에 있는 좌식 식탁을 치우고 그 방에서 자야하는 때가 있었다. 입식 테이블 쪽에 앉아 있다가 조금 느즈막히 친구랑 방에 들어가니 마땅히 누울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미닫이 문 앞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침이 온 느낌이 들어 눈을 떴더니 방 안엔 거의 몇 사람 남지 않았었다. 출입문은 하나였으니 방을 빽빽히 채웠던 사람들은 우리가 자는 위를 지나 이 방을 나갔을 거였다. 친구는 피곤해보였다. 사람들이 계속 드나드는 통에 잠을 한 숨도 못 잤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냥 빠져나가기만 한 게 아니라 화장실 가느라, 씻고 오느라 수도 없이 드나들었단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 말로만 그런게 아니라 정말로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런데, 어른들 말처럼 엄마가 되니 아이 우는 소리는 잘 들렸다. 아이가 아기였을 적에는 애앵 하고 울기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눈이 떠졌다. 내가 이렇게 작은 소리를 듣다니 엄마랑 아기는 정말 연결되어 있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직 어릴 때였다. 얼핏 들리는 소리 잠을 깼다. 본능적으로 내 앞에 자고 있는 아이를 만졌다. 온몸이 불덩이 같았다. 아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아이 옆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잠에 빠져있던 내가 어찌나 한심했는지, 그렇게 자고 있었을 지난 몇 시간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모른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그 소리라도 내주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웠는지.


아마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몇 년째 티비를 켠다. 그 중에서도 내가 빠져들어 볼 만큼 재미있는 채널을 고른다. 식을 것을 대비해서 적당한 크기의 볼에 적당히 따뜻한 물을 받고 아기때 쓰던 손수건을 적셔 아이 머리 맡에 둔다. 그리고 그 옆에 몸을 닦을 때 쓰는 큰 수건을 깐다. 손수건을 적셔 짤 때 손에 묻은 물을 닦아내기도 하고 아이를 닦아주러 오며 가며 흐르는 물이 그리로 떨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체온계를 곁에 둔다. 아이가 아픈 날 밤 내 루틴의 시작이다. 자지 않겠다는 의지다. 또 다시 그 날을 재현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불안이다.


나는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 불안이 싫다. 그런데 가끔은 그 불안이 나와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키게 하니, 이럴 때는 나도 미운 눈을 접고 너그러워진다. 오늘은 불안이 나를 깨워 밤을 새우게 해준 것에 감사하고, 내일이나 모레쯤 불안이 더 머물 이유가 없어 떠나면 그 때에 눈을 좀 붙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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