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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친구 용팔이2

그 친구는 상업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점점 잔인하게 변해 갔었다. 중학교 때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에게 복수를 했다. 체구도 작고 난장이에 곱추인 그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가난한 동네 친구들과 무리를 짓고 조직을 만들면서 칼잡이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힘을 가진 그는 중학교 때 자기를 괴롭힌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복수를 했다. 아주 잔인하게 말이다. 그 실력을 인정받으며 조직에서는 2인자가 되어 갔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영화를 보는 듯 했다. 나야 종교 생활과 대학도 경건한 곳을 다니다보니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이야기는 모든 게 신기했다. 이야기 하던 중간중간 다방에 들어오는 덩치 큰 젊은이들이 간간히 친구에게 “형님”하면서 인사하는데 놀라운 풍경이었다. 100키로 넘는 거구들이 외소하기 그지없는 친구에게 인사하는게 웃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조직의 2인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잔인하게 살았는지 느껴졌다. 나이트클럽, 스텐드 바 등의 외상 손님에게 술값 받는 일부터 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랑스럽게 칼에 맞으면 어떤 고통이 있는지 아느냐며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허벅지에 칼을 넣었다 빼면 피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고통스러워 한다고 말이다.

그는 서진룸싸롱 사건에도 관계가 있었다. 1986년 서진룸싸롱에서 조직폭력배가 다른 조직원 4명을 죽인 사건이었다. 그 두 파가 같은 고향 출신 조직이라서 처음에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알력다툼으로 이어지면서 살인사건이 되어버린 일이다. 그의 무용담을 듣다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분이 안됐다. 서진룸살롱에서 자신의 조직이 당하고 나서 버스에 조직을 태우고 서울로 향했는데 도경에서 고속도로를 막았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나 같은 평범한 대학생이 듣기에는 흥미롭기만 했다.

당시 전투경찰은 파출소에서 근무를 했다. 하지만 6.29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사회가 혼란해 지면서 파출소 근무인력은 민정당사 지키는 임무로 배치되었다. 대부분은 데모를 막는데 동원됐지만 파출소 인원은 지역 민정당사를 2교대로 지켜야 했다. 3시간 근무하고 3시간 숙소에서 자는 일을 하루 24시간 계속 해야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국 때문에 불평불만은 있었지만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라면 박스를 깔고 민정당사가 있는 복도 끝에서 잠을 자다가 다음 근무자가 오면 졸음 가득한 눈으로 숙소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던 나를 친구는 불러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솔직히 나는 근무지 이탈을 한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때와 다름없이 친구의 사무실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났다. 이 친구의 조직을 또 다른 조직이 쳐들어 온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들의 폭력이 문제가 아니라 근무지를 이탈한 내 상태가 문제였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연장(?)을 들었다면 나는 그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 내 근무지로 가기 위해서 연장을 들었다. 정신없이 사람 숲을 헤치고 나왔다. 누구 피가 나는지 누구의 뼈가 뿌러졌는지 알지 못하고 정신없이 휘두르고 달렸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잠잠해 질 무렵 그 밤중의 사건으로 친구는 쫒기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나에게 연락을 했다. 초췌한 몰골의 그는 작은 키와 꼽추인 몸이었다. 조직의 2인자가 아니라 중학생 때 그 모습과 같았다. 친구는 나에게 부탁을 했다. 집에서 그림 몇 점을 가져다주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식당을 접고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떼어다 파는 나까마 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을 하면서 알게 된 손님들을 대상으로 그림 장사를 하였고 그 사실은 친구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지막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그림을 훔칠 마음도 없었고 그 친구와 인연이 계속 될 수 없음을 짐작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친구 아름다웠던 추억만 기억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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