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 오브 스토리: 미완성의 저

Ep4 - 눈물의 황국과 얼어붙은 여왕

by sama

차디찬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발끝에서부터 얼어붙는 기분. 뭔가 단단한 얼음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앞엔 새하얀 성이 있었다. 기이할 만큼 아름답고,

동시에 위협적인 느낌.

성 전체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한 그곳은 누가 봐도 '던전'이었다.


『눈물의 왕국과 얼어붙은 여왕』.


네 번째 던전.

"이건…… 내가 세 번째 썼다가 접은, 감정 묵인 치유물……이잖아."

미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야기는 과거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자신의 눈물과 우울을 캐릭터들에게 투영해 썼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무서워서 끝내 다 쓰지 못하고 봉인해둔 이야기.


"감정의 왕국에서, 감정을 잃어버린 여왕이 지배하는 곳……"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코트를 여미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옆에는 새로운 동화 속 조력자가 등장해 있었다.

파란 숄을 두른 남자. 뾰족한 귀와 반짝이는 눈동자, 눈꽃 결정이 흩날리는 듯한 기운.


"난 잭. 동화 '눈사람 잭과 사라진 봄'에서 나왔지. 원래 주인공이었는데……"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작가님이 엔딩 전에 겨울을 끝내버렸잖아. 난 제대로 녹지도 못하고 사라졌거든."

"……미안."

"괜찮아. 그래서 이번에 도우러 온 거야. 이 눈물의 왕국, 여왕의 마음을 녹이러."

그 말에, 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았다.

이 던전의 보스는 단순한 적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존재.

그 순간, 그녀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이세계에서도 이상하게 가끔씩 울리는 '현실의 연결점'이었다.


[입금 3,200,000원 - 상상출판 원고료 지급 완료]


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짜야……?"

고작 1권이었는데, 원고료가 이 정도라니.


[이제 당신은 정식 작가입니다. 인터뷰 요청: OCN문화방송]


그녀는 입을 틀어막았다. 현실의 성공이, 이세계와 교차하는 이 마법 같은 느낌.

하지만 정신 차려야 했다.


"잭, 우리 가자. 여왕님을 만나러."


성 안으로 들어선 미나는 곧 얼음으로 된 거울들을 마주했다.

그 안엔 자신이 버린 설정, 감정, 슬픔, 눈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

은빛 왕좌에 앉은 여왕이 눈을 떴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단지, 모든 감정을 얼려둔 채

가장 슬픈 미소를 지은 채로—


"작가여. 너는 나를 기억하니?"


눈물의 왕국.

감정의 봉인.


이제 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시간이었다.


눈물의 왕국 중심부. 얼음 왕좌에 앉아 있던 여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색 드레스 자락이 얼음 바닥을 스치며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녀는 미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작가여. 너는 나를 버렸지."


그 목소리는 차갑고 조용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속엔 깊은 외로움이 스며 있었다.

미나는 여왕과 마주 서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게 무서웠어."


여왕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당신은 내가 슬픔을 인정하면 무너질까 봐 만든 캐릭터였어.

내가 너무 지쳐 있던 시절에, 내 안의 아픔을 대신 겪게 하려고 만든 사람이었어."


여왕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그녀의 눈 밑에 얼음 결정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완전히 얼어붙은 감정의 조각이었다.


그때 잭이 나섰다.

"여왕님, 당신이 감정을 봉인했을 때, 그건 작가님만의 잘못은 아니에요.

저도 당신 이야기의 일부였고, 함께 겨울 속에 묶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우리 모두, 다시 쓸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여왕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날 어떻게 구하겠다는 거지?"


그 순간, 성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거울들이 깨지기 시작했고, 거울 속엔 미나가 써두고 외면했던 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울지 마, 그건 약한 거야."

"감정은 독이 돼."

"지금은 견디기만 하면 돼."


모두, 그녀가 자신에게 되뇌었던 말들이었다.

미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이젠 괜찮아. 감정은 독이 아니라…… 나 자신이야."

그녀는 손을 뻗어 얼음 거울 조각 하나를 부숴버렸다.

그 순간, 방 전체가 반짝이는 빛에 휩싸였다.

여왕의 몸에서 서서히 얼음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표정이, 눈빛이, 체온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 있었구나."


여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당신도 당신의 감정으로 살 수 있어.

더 이상 버려진 설정이 아니야.

당신은 내 슬픔이자, 치유의 상징이야."


[시스템 알림]

주요 감정 던전 클리어

캐릭터 '얼음 여왕' 복원 완료

감정 봉인 해제

새로운 감정 계열 플롯 해금: 『눈물의 치유자』


던전이 천천히 무너지는 가운데, 여왕은 조용히 미나를 바라봤다.

"고마워, 작가여. 그리고… 다음 이야기도, 기다릴게."

여왕의 몸이 빛으로 흩어졌다.

현실 세계.

미나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OCN문화방송 - 인터뷰 일정 확정 / 7월 30일 오전 11시]

[입금 1,100,000원 - 2차 원고료 정산 완료]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중얼거렸다.

"좋아, 다음 던전도 가보자."

눈물의 왕국이 서서히 녹아내린 자리.

미나는 새로운 통로를 따라 깊숙이 들어갔다.

얼음 여왕이 사라진 뒤에도, 왕국엔 여전히 얼음으로 봉인된 구역이 남아 있었다.

그 중심에 위치한 곳.


고대 도서관.

감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공간.

서고 앞에서 조용히 미나를 맞이한 이는, 은빛 단발의 사서였다.

그는 눈을 감고 책장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미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눈을 뜨며 말했다.


“나는 이 왕국의 감정 기록자. 감정을 읽되, 느끼지 않는 존재.”


그는, 감정을 기억만 할 뿐 직접 겪지 못하도록 설정된 인물이었다.

미나는 천천히 물었다.


“왜 그런 설정을 했을까, 나는…?”


사서는 책장을 스윽 넘기며 말했다.


“작가가 감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내 안엔 모든 인물의 감정 기록이 들어 있다.

특히, 작가의 것도.”


그 순간, 사서의 눈이 붉게 변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질문할 자격이 생겼다.”

“……뭐?”

“왜 나는 ‘기억만 하는 존재’로 끝나야 했지? 나는 왜 살아 있는 감정을 갖지 못해야 했지?”


현실.

[방송 작가 인터뷰 응답 요청 – '작가 미나의 감정 루트']

[3차 입금 완료 – 2,200,000원]

미나는 노트북 화면을 보다 말고 숨을 헐떡였다.

“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닿기 시작했어.”


다시 도서관.

사서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죽은 이야기를 지키는 자였어. 하지만 이제, 살아 있는 감정을 배우고 싶어.”

그는 손을 뻗어 미나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신이 쓴 감정. 그게 나를 바꿀 수 있을까?”

미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같이 바꿔보자.”


[시스템 알림]

감정 전이 성공

사서의 캐릭터 재구성 시작

감정 공명률 +40%


은빛 서고의 문이 열리고, 오래된 이야기들이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사서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장을 쓰자. 작가.”

도서관의 마지막 서고가 열리자, 미나는 사서와 함께 어둡고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 끝엔 커다란 거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

거울 표면은 얼어붙어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모습 대신 낯선 풍경이 비쳤다.

사서는 조용히 말했다.


“이곳은 ‘망각의 미로’. 작가가 쓰고 지워버린 플롯 조각들, 그리고…

끝까지 써보지 못한 캐릭터들의 감정이 흘러드는 곳이야.”


미나는 거울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검은 숲, 비틀린 나무들 사이를 미완성의 인물들이 떠돌고 있었다.

반쯤 지워진 외형, 의미를 잃은 말투, 정체를 잃은 감정들.

그들은 미나를 알아보자마자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리를 왜 버렸나요…”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어요…”

“당신은 항상 쓰다 마는 사람이었죠…”

미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사서가 그녀를 붙잡았다.

“작가여, 여긴 당신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외면해선 안 됩니다.”

미나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현실.

[『달 없는 밤의 뱀파이어』 리뷰 수 1,000+ 돌파]

[『감정 루트』 작가 미나 – SNS 실시간 트렌딩 3위]

[OCN 아침 라디오 인터뷰 요청 – “왜 감정인가요?”]

미나는 커피를 마시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빛이 나기 시작한 세계.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미로 속 중심에 다다른 미나는, 작은 아이 하나와 마주쳤다.

그 아이는 앉아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흑백의 크레용으로 낙서를 하듯, 어떤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너는 누구야?”

“……옛날의 미나.”


아이의 목소리는 작고 조용했다.


“언제나 혼자 놀았고, 이야기를 만들었어.

아무도 읽지 않아도 괜찮았어. 상처받기 싫었거든.”


미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건 확실히,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동화책을 찢고 붙이고, 스스로 ‘끝’이라고 쓰고도 믿지 못했던 나날들.

그 아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젠 괜찮아졌어? 다시 시작해도 돼?”


미나는 조용히 끄덕이며 말했다.


“응. 이제는 끝까지 가볼게.”


[시스템 알림]

‘작가의 망각’ 치유 완료

망각의 미로 봉인 해제

감정 회복률 100% 도달

다음 던전 입구 개방 중…


현실.

미나는 출판사로부터 도착한 원고 확인 메일을 열었다.

“최종 원고 잘 받았습니다. 감정의 서사와 캐릭터 완성도가 훌륭합니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서울의 여름 햇살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그때, 책장의 맨 아래에서 또 다른 책이 빛나기 시작했다.


『울어야 웃는 삐에로』


미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진짜 복잡한 이야기로 들어가야겠네.”

사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이었다.

“정치, 회귀, 완벽주의… 이건 감정보다 더 깊은 이야기야. 작가님, 준비됐나요?”

미나는 살짝 웃었다.

“그럼,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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