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의 일기 12
으엑 알파고(AphaGo). 구글의 인공지능 컴퓨터. 나는 한동안 알파고가 싫어질 뻔했다.
지난 1월 28일부터 알파고와 이세돌 9단 사이 펼쳐진 세기의 바둑 대결 이슈를 팔로업했다. 지난 9일(수요일) 첫 경기가 열렸다. 덕분에 이날 수습기자 4개월차 정말 다이내믹한 하루를 보냈다. 힘들고 어지럽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난 15일(화요일) 5번째 대국은 직접 브리핑실에 올라가 함께 지켜봤다. 5시간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은 정말 괴로웠다.
1월 28일 사전 브리핑 1차 - 참가
2월 22일 사전 브리핑 2차 - 참가
3월 8일 사전 브리핑 3차
3월 8일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 컨퍼런스 - 참가
3월 9일 제프 딘 구글 수석 연구원 머신러닝 설명회 - 참가
3월 9일 1국 - 참가
3월 10일 2국
3월 12일 3국
3월 12일 머신러닝 레볼루션 컨퍼런스 - 참가
3월 13일 4국
3월 15일 5국 - 참가
알파고 때문에 한달 전부터 잡았던 점심 약속은 거의 다 취소했던 것 같다. 예정돼 있던 기사 발제 스케줄도 다 1~2씩 미뤄두고 행사(콘퍼런스)를 참석하느라 바빴다. 중간에 데미스 하사비스 CEO가 대전 KAIST에 내려가 강연하는 일정도 있기는 했다. 1월 말부터 시작했던 한국 내 '알파고' 열풍은 5국을 끝으로 끝나기는커녕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다.
첫날 때는 1국 관전평과 나머지 경기 결과에 대한 멘트를 찾으려다 보니 어깨에 퍽 힘을 많이 줬다. 하루종일 긴장하느라 장시간 '거북목'을 한 탓에 목이 뻐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히려 주어진 시간 안에 빠르게 기사를 써야 한다는 미션이 주어지니 능률이 더 높아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힘들었지만 좋았던 것도 있다. 평소 관심있 었던 주제이기도 했고 업계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기회였다. 게다가 인공지능에 오랫동안 연구해오던 교수님 인터뷰 일정을 잡는 데도 성공했다. (수습) 기자가 아니었다면 꿈꾸지 못한 일들이 단 몇 주 사이에 벌어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현장 상황을 경험해볼 수 있었던 아주 좋은 기회였다.
본인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학부생 시절에 '인공지능'이나 '확률과 통계'를 재미있게 공부한 기억이 난다. 프로그래밍적 지식을 쌓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 반면, 이론을 공부하는 부문에서는 재미를 느꼈다. 수학적으로 설계하고 검증하는 부문은 쥐약이었지만 그래도 인공지능 발전사와 이론체계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땐 그냥 좋았다.
6년 전 학부생 때 열심히 더 공부할 걸. 그런 아쉬움이 든다. 물론 매체 특성상 인공지능의 기술 원리나 탐색 알고리즘 등 기술적인 부문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그 원리를 잘 안다면 말로 풀어쓰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 딥러닝, 심화학습, 강화학습, 기계학습, 지도학습, 비지도학습, 패턴인식, 데이터마이닝 등. 그래도 난 이것들의 차이점이나 특징이 뭔지는 구분할 줄 아는 공대생 출신이다!
그런 뒤 대학교를 졸업하고 IT분야 에디터로 1~2년 정도 일하면서도 계속 관심이 갔다. 앞으로 '뜰' 산업이기에 선도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 미진했던 학업을 채우고 싶은 욕망도 들었다. 이왕이면 전공도 살리고 업계 전문가의 이야기를 제대로 잘 전달하는 것도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국 마지막 대결이 펼쳐지는 그 와중에도 수백, 수천 개씩 쏟아져나오는 인공지능 관련 수많은 기사를 보며 온갖 생각을 해봤다. 과연 무엇을 위해 기사를 쓰는 건지 문뜩 궁금해지기도 했다. 기사를 쓰기 위한 기사도 몇 개 보였고, 기술에 대해 명확하게 기술하지 못하고 대중잡아 묘사한 것도 언뜻 보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정말 훌륭한 기사들이 많이 나왔다. 각 언론 색깔에 맞춰서 재미있는 시각에 쓴 기사들도 돋보였다. 일간지는 이세돌 9단과 바둑에 조금 더 초점을 두고 풀어썼다면, IT 전문지는 인공지능 산업과 현황, 경제지는 인공지능 관련 기업 현황을 잘 전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알파고가, 그리고 인공지능이 지금 당장이라도 인류의 일자리를 대체할 것처럼 기술된 제목과 문장들이 조금은 우려스러웠다. 여러 관점에서 사안을 파악하고 다양한 의견을 전달해주는 것이 기사다. 다만 그 기울기가 한쪽으로 치우친 탓에 균형이 깨졌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기술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인공지능포비아(AI-phobia) 조짐마저 보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무지했다기보다는, 개인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줄 정도로 부정적인 기사가 많이 나오기는 했다. 아직 인간의 두뇌를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의 인공지능의 시대는 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있어 보이면 다 들러붙는 언론의 단편을 볼 수 있었던 사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히려 고민이 늘어났다. 결국에는 네이버 콘텐츠 제휴에 성공한 매체, 조중동의 기사만이 조명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람들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기사를 많이 본다. 인지도도 높아서 취재하기도 쉬운 편이라고 한다. 기업 주요 경영진들은 한국경제, 매일경제 외에는 잘 안 본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외 다른 매체들이 승부를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과 똑같은 전략을 구사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그렇다면 스페셜리스트전략을 구가해야 한다.
그렇지만 스페셜리스트로 나아가기엔 내가 내세울 만한 전문분야는 없다. 그나마 관심 있는 카테고리는 생산성(Productivity)인데 이것도 요즘 수습생활에 적응하느라 포기한 지 오래다. 수습생활 자체가 생산적일 리가 있나.
인공지능? 백날 테크 전문기자라고 해봐도 한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한 분들의 실력에 발끝에도 못 미친다. 결국에는 많이 보고, 듣고, 읽어야 한다는 건데 머리가 나쁘면 같은 시간에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은 전문가를 많이 아는 인맥에 달려있다. 인맥은 결국 혈연, 학연, 지연으로 나뉜다.
그러니까 좋은 기자가 되려면 처음부터 좋은 집안에 태어났거나, 좋은 학벌을 타고났거나, 땅부자인 집에서 태어나거나 아니면 머리가 정말 비상하거나, 정치(인간관계)를 잘하거나 이 카테고리에 속해야 한다는 것에 귀결된다.
그래서 고민인 거다. 알파고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이런 고민은 거의 없었다. 노력하면 나도 좋은 기자, 남들이 인정해주는 기자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뭐하나 뛰어난 것 없으니 몸으로, 열정으로 하다 보면 언젠가는 쟁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엔 알파고 이슈에서 뭔가 차별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에 좌절감 '이빠이’다.
열정만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걸 때때로 겪을 때마다 무기력함을 느낀다. 수습 4개월 주제에 대선배들이 쓰는 기사와 같은 인사이트를 하루라도 빨리 주고 싶어 하는 조급함이 오히려 열정을 갉아먹는 것 같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내 능력 밖의 일을 할 수 있을까. 무늬만 공대생 출신일 뿐이고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이 내심 마음에 걸린다. 잘하고 있기는 한 걸까.
기자질도 똑똑해야 해먹고 사나 보다. 완전 우울함에 두뇌 회전이 안된다. 렉이 걸린 듯한 느낌이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조급함에 될 일도 안 되는 것 같다. 수습 4개월 차. 이제 2개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