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습기자의 일기 22
어제(23일)부로 탈견했다. 수습 6개월을 끝내고 드디어 정기자가 됐다는 의미다. 아직까지 크게 달라진 점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탈견했어도 부서, 팀 막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일단 다음 달 월급을 받아봐야 정식기자가 됐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아 감상문은 미뤄둘 참이다.
지난 주말에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수습생활부터 다시 시작했어야만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억울함, 분노로 가득 찼던 지난해 상반기가 떠올랐다. 해법은 기자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작년 이맘때 일이다. 혼자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어떤 남자가 반대편에서 걸어왔다. 서로 마주하며 가까이 걸어오(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신체 특정 부위를 보더니 "존나 꼴린다"라는 말을 했던 것. 날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x됐다 싶었다. 정말 잘못하면 길 한복판에서 성추행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칼에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어머머어어어어ㅓㅁ마 저리 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그 남자를 스쳐 지나갔다. 그 변태 새끼는 뒤돌아보면서 씨익 웃으며 걸어갔다. 가다가 "어쭈"하며 나를 쫓아오는 시늉을 하더니 제 갈 길 갔다.
집에 도착하니 다리에는 힘이 저절로 풀렸다. 눈물이 났다. 뭔 잘못을 했길래 길 가다가 이런 봉변을 당해야 하나 싶었다. 아마 여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일생에 한 번쯤은 겪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후폭풍이 한 달은 갔던 것 같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일을 겪으면 정신적인 피해를 호소하고는 한다. 실제로 한 지인은 성적인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술에 탄 약이 문제였다. 약 탄 술을 의심 없이 받아먹은 여성은 성적 폭행의 피해자가 됐다. 부모에게 말도 못 꺼내고 술만 마시던 그녀는 결국 극단의 방법을 선택했다. 분명 제2의, 제3의 피해자가 있을 만한 사건이었지만 부모는 수사를 더욱 진척시키지 않았다. 피해 당사자는 저 세상 가고 없으니 더는 조사를 진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사건. 그렇지만 아픈 마음을 호소할 곳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법과 정의는 가해자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는 걸 피부로 깨닫는 사건이었다. 힘이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언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최초의 일이기도 했다.
페이스북에 초벌 번역가를 모집한다는 광고 때문에 소송에 휘말릴 뻔했다. 구글링을 해보니 사짜 삘이 났다. 나처럼 광고에 낚이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공익적 차원에서 글을 썼던 게 문제가 됐다.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추가 비방글들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000을 희생양 삼아 본인의 블로그를 홍보하고 수익률을 높여 돈벌이에 이용하시는 바 0000은 선의의 업체의 명예를 훼손하고 업무방해한 민ㆍ형사상의 책임을 귀하에게 반드시 묻도록 하겠습니다."
돈이나 벌었으면 다행이다. ㅜㅜ
고소장이 오길 기다렸는데 다행히 오지 않았다. 구글링을 해보니 부정적인 댓글이나 글을 게재한 사람들에게 검찰에 고소하겠다는 것을 빌미로 글내림을 요구하고 있는 듯했다. 카페 외에는 이 업체에 대한 비판적인 글에 대해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실제로 고소당할 까봐 무서운,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었다. 주말에도 스트레스받아 남자친구 앞에서 울었다. 이 때문에 새벽 3시까지 사이버 명예훼손법이나 소비자권리보호법을 공부하느라 바빴다. 나와 같은 사례로 고소까지 당했다가 혐의가 없음을 최종 판결받은 블로거한테까지 의지해야만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난생처음 경찰서까지 찾아갔다. 마침 당직 경찰관은 사이버 명예훼손 업무를 담당하던 분이었다. "제가 이런 사건에 휘말렸는데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제가 잘 판단할 수 있도록 사실 관계만 이야기해주세요.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만 말해주시면 됩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경찰은 소송까지 가면 내가 이길 확률이 높다고 했다. 공공을 위해 정보 공유를 했던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 쪽에서 다소 과격한 문구를 걸고 넘어지면 문제가 복잡해질 거라고 말했다. 벌금형에서 끝나면 다행이고, 아니면 원만한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 제일 베스트라고 첨언했다.
현행법상 한국에서는 허위사실이든, 사실이든 공연하게 적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이 가능했다. 물론 위법성 조각사유를 제시하면 됐지만, 무죄를 입증하는 건 결국 내 몫이었다. 변호사 선임비로 몇천만원 쓸 각오도 했지만 결국은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내부 취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단순히 느낌과 감정만으로는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만약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를 제시하고 변호사 멘트를 박아 넣었다면 이 기업도 나를 명예훼손으로 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혹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호받을 방법은 많았을 것이다. 불합리한 작태에 대해 써야 한다면 블로거보다는 기자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송 건으로 혼을 빼앗긴 지 불과 한 달 만에 또 문제가 발생했다. KT 홈페이지 대리점을 통해 구입한 S4 줌이 문제가 됐던 것. 상품 구매 청약 철회는 배송받은 후 1주일 안에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품을 요구하니 "안된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시초가 됐다.
애초에 S4 스펙을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고 구매한 내 잘못도 있다. 결국엔 반품에 성공하지 못해 서랍 속에 처박아 뒀던 S4는 현재 아버지 손에 넘어갔다.
KT고객센터 팀장이라는 사람과 수차례 통화하고 나서 몇 가지 확인 받은 내용이 있다. 단순히 포장을 풀었다고 해서 상품의 가치가 현격하게 떨어지지 않는 것까지는 상대방도 동의했다. 제품 특성상 확인을 위해 박스를 뜯어 전원을 켜 구동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포장을 뜯고 몇 번 사용한 흔적이 있다 해서 상품의 가치를 현저히 격하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개통 시점"을 언급했다. 개통된 폰은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여기서 의문을 가졌다. 애초에 통신 개통과 단말기 구매를 따로 하면 되잖아!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중고폰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면 국내산 스마트폰은 할부 거래와 동시에 통신사 개통이 이뤄진다. 한편으로는 이게 반품을 막기 위한 한가지 꼼수가 아닐까 생각마저 들었다.
제품을 뜯어보고 먼저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개통해도 되는 시스템이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직도 스마트폰을 구매하기 위해 이통사 대리점이나 홈페이지를 먼저 방문해야 한다. 의문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의문이다.
예전에 공정거래위원회 탐방을 갔을 때 질문한 적이 있는데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소비자보호원은 안된다고만 이야기한다. 어떤 변호사들은 스마트폰도 7일내 청약철회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누리꾼들은 이런 자료를 캡쳐해 "청약철회가 가능하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는데 이마저도 불확실하다. 불확실한 정보의 유통으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는 데 정부도, 기업도 묵묵부답이다.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KT고객센터는 "이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일부 악용하는 사람 때문에 선의의 고객들까지 소비자로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막는 게 맞는 건가? 애초에 계약 자체가 허위인 경우에도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고객이 봐야 한다. 뭔가 잘못된 구조다.
아무리 블로그에 불합리성을 떠들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글에 힘을 싣기 위해서라면 내게도 자격 있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그게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였다.
4개월 간 기자를 준비하고, 6개월간 수습생활을 마쳤다. 그리고 불합리한 사건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어떻게 하면 기사를 잘 퍼블리싱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내게 선배는 "정의감"을 말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기자는 어려운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칭찬은 쉽다. 그러나 건실한 비판은 어려운 일이다. 비판의 역할이 내 역할임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