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0322.
주말 아침. 완연한 봄기운의 유혹을 참을 수 없어 자전거를 끌고 한강변으로 나섰다.
한강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이 봄이 깊이 왔음을 실감케 한다. 쏟아지는 봄햇살 아래 흐르는 강물 위로 봄바람이 잘게 부딪힐 때마다, 수천 개의 보석이 부서지는 듯한 풍경이 연출된다. 마치 강물 위에 은빛 다이아몬드를 뿌려놓은 듯 반짝, 반짝, 반짝. 마치 강이 춤을 추는 것처럼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멈추고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 현상에 아름다운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더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윤슬'
햇빛이나 달빛이 물결에 비쳐 반짝이는 모습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윤슬'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소리만으로도 그 장면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윤-슬.' 입안에서 굴려보면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느낌. 이토록 아름다운 현상과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싶다. 우리말의 고운 결을 잘 살리면서, 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래어도 아닌 순우리말로 빛과 물의 만남을 이렇게 감각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지은이의 감각에 새삼 놀란다.
하지만 윤슬은 아무 때나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빛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또 바람이 있어야 한다. 너무 잔잔한 수면 위에서는 오히려 윤슬이 잘 생기지 않는다. 물결이 적당히 일렁여야, 빛이 여러 각도로 굴절되며 그 반짝임이 탄생한다. 빛 혼자서도, 물 혼자서도, 바람 혼자서도 만들 수 없는 것. 이 세 가지가 딱 어우러지는 순간에만 비로소 나타나는 현상이 윤슬이다.
그래서 윤슬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이 아닌 장면'이다.
생각해 보면 기획을 하다 보면 비슷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맴돌던 아이디어가 어느 날 갑자기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순간들은 대부분 아이디어를 짜내던 회의실도 아니고, 머리를 싸매던 모니터 앞도 아닌 전혀 엉뚱한 순간들인 경우가 많다. 샤워를 하거나 산책을 하다가, 혹은 우연히 편 책 한 구절속에서, 때로는 멍하니 멍 때리는 순간에 불쑥 찾아오곤 한다.
흔히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고독한 천재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지난 16년간 현장을 지켜온 한 사람으로서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좋은 기획안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탄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만 한다. 첫 번째로 오래 쌓아온 데이터라는 '물'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시장을 읽으려는 끊임없는 관찰이라는 '빛'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도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고객의 불만 한마디에서 시작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분야의 책 한 줄일 수도 있으며, 오늘 아침 출근길 우연히 마주친 풍경일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어느 지점에서 딱 만나는 순간, 기획의 '윤슬'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멀리서 보는 윤슬은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그 잔물결을 만들기 위해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바람은 부지런히 수면을 두드린다.
우리가 마주하는 ‘성공한 기획’의 반짝임 뒤에는 이 같은 치열함이 숨어 있다.
단 한 줄의 문구를 정하기 위해 밤새워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던 시간들, 협력사와의 이견을 좁히기 위해 수없이 오갔던 메일함의 열기, 자료를 모으고, 현장을 뛰어다니고,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숫자를 들여다보며 보낸 수많은 시간들이 수면 아래에 흐르고 있다.
파스퇴르가 말했다. '행운은 준비된 자를 찾아온다'고..
결과물은 윤슬처럼 아름답게 빛나야 하지만, 그 아래를 받치고 있는 기획자의 시간은 결코 우아하기만 할 수 없는 이유다. 묵묵히 흐르는 강물 같은 ‘성실함’이 전제될 때, 비로소 세상은 그 기획의 반짝임에 주목한다.
이 깨닮음을 얻고 난 후 나는 '막힘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윤슬은 찰나의 순간이다.
해의 각도가 조금만 바뀌어도, 혹은 구름이 빛을 가려도 윤슬은 금세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기획의 감각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문득 떠오른 영감,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통찰, 회의 중에 스쳐 지나간 아이디어들. 이런 ‘영감의 윤슬’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증발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수첩을 꺼낸다. 거창한 전략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내 마음을 건드렸던 반짝이는 단어들과 이미지들을 수집한다. 이 작은 파편들이 쌓여 훗날 거대한 기획의 물줄기를 트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떠오른 아이디어는 잡지 않으면 사라진다.
좋은 기획자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메모는 윤슬을 건져 올리는 그물이다.
3월의 한강은 유난히 반짝인다.
이는 낮과 밤의 길이가 비슷한 '춘분(春分)'과 '추분(秋分)' 무렵에 햇빛의 각도 때문이다.
기획도 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시대의 흐름이라는 빛을 만나지 못하면 빛나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조명 아래서 박수받는 순간보단, 누군가의 일상을 잔잔하게 빛내줄 ‘윤슬 같은 기획’을 꿈꿔본다.
비록 아름다운 순간은 금세 사라질 찰나일지라도, 그 빛을 본 사람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따뜻한 잔향이 남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