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0320.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바라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앙상하기만 하던 벚나무 가지 끝에 연분홍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 꽃이라 부르기엔 이르지만, 분명 어제와는 다른 빛깔이 느껴진다. 공기도 한껏 봄기운이 돈다. 차갑다기보다 서늘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아침이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지만, 이미 봄이 그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고 있다는 걸 내 몸이 먼저 안다.
오늘은 봄의 정가운데를 가리키는 절기 '춘분(春分)'이다.
'봄 춘(春)'에 '나눌 분(分)'. 말 그대로 봄을 나눈다는 뜻이다.
'나눌 분(分)'자를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칼 도(刀)'와 '여덟 팔(八)'이 합쳐진 글자로, 칼로 무언가를 정확히 둘로 가른다는 의미를 형상화한 것이다. 봄을 정확하게 반으로 자른 것. 춘분은 그런 날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정확히 12시간씩, 딱 반으로 나뉘는 날. 1년 365일 중 오직 두 번, 춘분과 추분에만 허락되는 완벽한 균형의 순간.
그래서일까?
오늘은 왠지 자를 꺼내 무언가를 재고 싶어지는 날이다.
춘분은 태양이 적도 위에 위치하여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시기다.
천문학적으로 태양이 적도의 남쪽에서 북쪽을 통과하는 때를 말하며, 바로 이 지점을 바로 '춘분점'이라고 한다. 양력 3월 20~21일 경이다.
이 날을 기점으로 밤보다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며, 기온도 상승하며 계절이 변화하게 되는데, 춘분 이후 완연한 봄이 찾아오며 따뜻한 봄날이 시작된다. 우리가 실제 체감할 수 있는 진짜 봄의 시작 또한 춘분 이후부터다. 하지만 이 무렵 갑작스런 추위가 기승을 부리기도 하는데, 이를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듯한 추위'라는 의미로 '꽃샘추위'라고 부른다.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뛰어난 '카피라이터'는 존재했구나 싶다.
옛사람들은 춘분을 단순히 낮과 밤이 같아지는 천문학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음(陰)과 양(陽)이 완전히 평형을 이루는 날로 여겼다. 겨우내 음의 기운이 세상을 지배했다면, 춘분을 기점으로 양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다. 그 팽팽한 균형의 순간을 농사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이 날을 전후해 본격적인 파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낮과 밤의 균형이 맞아야 씨앗을 심을 수 있다는,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단단한 철학이 담겨있는 풍습이다.
춘분에 콩을 볶아 먹으면 봄철 면역력이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쥐를 없애 곡식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볶은 콩'을 먹는 풍습이 있었다. 추운 겨울 동안 쉬었던 머슴들을 불러 일 년 농사를 부탁하며 송편과 비슷하게 생긴 떡을 대접했는데, 나이 수대로 먹였다고 해서 '나이떡'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봄 하면 제철 채소가 생각나는 계절인만큼 쑥, 냉이, 달래 등 제철 봄나물을 캐서 먹으며 겨울철 피로를 풀고 혈액순환과 면역력을 높였다고 전해진다.
춘분 무렵은 꽃이 피기 시작하고, 겨우내 남쪽으로 내려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시기다.
옛말에 '제비가 돌아오면 춘분'이라 했는데, 제비는 기온과 일조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표적 새다. 본능적으로 균형의 순간을 감지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정확히 제 집을 찾아드는 제비를 보며, 옛사람들은 얼마나 경이로움을 느꼈을까 싶다.
추위와 더위, 낮과 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이 계절을 지나며, 기획자인 나는 '균형'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기획은 태생적으로 '불균형'에서 시작되기에 '균형'이라는 단어가 남다르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들뜬 계획들의 1월, 조용한 조율의 2월, 본격적인 실행의 3월. 그 시간의 흐름을 타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과 함께 문득 멈춰 서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 춘분이 딱 그 타이밍이다.
기획의 세계에서 '균형'이란 단어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개념이다.
'속도'와 '완성도' 사이의 균형
빠르게 치고 나가면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 하지만 설 익은 기획은 브랜드의 신뢰를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고 완성도만 쫓다 보면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다. 아무리 완벽한 상품을 기획했더라도 봄에 내놓아야 할 상품을 여름에 출시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 두 가지 힘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기획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다.
'감(感)'과 '데이터(Data)' 사이의 균형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 '촉'이라는 게 생긴다. '이 상품은 될 것 같다'는 일종의 직관이다. 헌데 '직관(直觀)'이 데이터의 뒷받침 없이 홀로 설 때는 위험한 순간이다. 반대로 숫자만 들여다보다 보면 숫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시장의 흐름을 놓친다. 데이터는 과거를 말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반면 감과 직관은 미래를 향하기에,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기획은 설득력을 얻는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
상품기획자는 숫자로 증명해야 한다. '차가운 현실'의 영역이다. 하지만 고객의 심장을 뛰게 해야 하는 것은 '뜨거운 이상'의 영역이다. 현실에만 매몰되면 기획은 지루한 보고서가 되고, 상품기획자가 아니라 '장사꾼'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이상에만 치우친 기획자는 '몽상가'로 전락할 수 있다.
춘분이 낮과 밤을 정확히 반으로 나누듯, 숙련된 기획자는 이 두 가지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균형은 '정지(停止)'가 아니다.
몇 해 전, 요가를 처음 배우던 시절의 일이다. 물구나무서는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는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강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균형을 잡으려면 멈추겠다는 느낌이 아니라 계속 미세하게 조정한다는 느낌으로 해보세요.'
처음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는데, 물구나무를 서게 된 이후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얼핏 보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몸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중심을 잡고 있는 것. 그 미세한 조정의 연속이 바로 균형의 진실이다.
나는 기획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기획자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기획을 한 번에 세우기 위해 고심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기획이 나오기 어렵다. 시장의 반응을 보며, 내부의 변수를 감지하고, 방향을 조금씩 틀어가는 과정 없이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미세 조정의 과정들이 결국 프로젝트를 목표 지점에 데려다 놓는다.
춘분의 낮과 밤이 딱 한 번 균형을 이루고 끝나지 않듯, 그 이후로도 계절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균형은 '목적지(目的地)' 개념이 아니라 잠시 점검하는 '기착지(寄着地)'에 가깝다.
이른 아침 출근 후 나는 책상 위에 올해 진행 중인 기획안들을 펼쳐놓았다.
1월에 세웠던 목표들. 2월에 수정한 것들. 3월에 실행에 옮긴 것들. 그리고 아직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들. 이렇게 하나씩 펼쳐놓고 바라보니, 어떤 것은 생각보다 많이 앞서 있고, 예상보다 훨씬 뒤처져 있는 것들도 보인다. 완벽하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솔직히 하나도 없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실패의 증거가 아님을 나는 안다.
오히려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임을 나는 안다.
춘분이다.
이 계절이 내게 가르쳐주는 게 있다면, 균형이란 애초에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연도 겨울의 무게와 봄의 기운이 팽팽히 맞서며 조율하는 시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춘분'의 균형의 시간에 다다르듯, 그 조율의 시간을 견뎌낸 것들만이 '균형'이라는 그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분기점(分岐點)이란 단어에도 '나눌 분(分)'이 들어 있다.
춘분의 그 '分'과 같은 글자다.
길이 갈라지는 곳.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지점.
지금, 춘분의 자리가 딱 그 분기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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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벚나무가 오늘따라 다르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