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0115.
도쿄의 밤 하면 빼먹을 수 없는 장소가 바로 이자카야(いざかや)다.
1월의 도쿄의 밤은 서울만큼이나 차갑다. 쇼핑의 성지 긴자. 명품 거리를 배회하며 지친 다리를 이끌고 찾아간 긴자의 뒷골목 한 켠에 자리 잡은 '누루칸 사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기의 밀도가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이자카야지만 일본 특유의 오밀조밀하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고급 스시집과 와인바를 절묘하게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위기인 '요코초(横丁)'의 그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특유의 유난스러움 때문이다. 다양한 그들만의 사케(日本酒) 컬렉션도 예사롭지 않지만, 무려 11단계의 온도로 나누어 서빙하는 모습을 보면 디테일을 넘어 집착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나는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음식과 술을 먹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이 있다. 식문화에 대한 이해야말로 그 문화를 이해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라는 믿음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에 머무는 동안은 술은 웬만하면 사케(日本酒)를 즐겨 먹는 편인데, 의외로 술집에서 내놓는 사케 종류가 단순한 편이라 놀랄 때가 많다. 이러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누루칸 사토'다.
1.공간으로 정체성을 표현한다.
이곳에 들어서면 일단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고급 와인바를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사케 컬렉션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가게에 들어섬과 동시에 '여긴 사케에 진심인 곳이군'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VMD관점에서도 매우 인상 씬이다.
이게 이곳의 첫 번째 '킥'이다. '우리는 사케에 진심인 가게'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고객의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심어주는 것! '맥주나 한 잔 할까'란 생각으로 들어온 사람도 '사케'를 주문하지 않고는 못 베길 것만 같다.
2.기본에 충실하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마주한 곳은 최고급 스시집을 연상시키는 '오픈 주방'과 '바테이블'이다. 마치 '우리는 요리에도 진심이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바테이블에 둘러앉아 능숙한 셰프의 손놀림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게 두 번째 '킥 '이다.
어쨌건 자고로 음식점은 음식이 맛있어야 한다. 일본의 이자카야가 그렇듯 양이 적기 때문에 여기서 끼니를 때울 요량이라면 뜯어말리고 싶지만, 내놓는 요리의 퀄리티는 일류 스시집 못지않다. 최고급 일본식 요리주점을 찾는 사람이라면 강력 추천한다.
3.경험을 기획하라.
자리에 앉으면 주방을 가득 채운 엄청난 '사케 컬렉션'이 눈에 들어온다. 술은 '잔'과 '병; 단위로 주문할 수 있는데, 주문할 수 있는 사케의 종류가 다양하니 이왕이면 '잔 술'을 시켜 여러 가지 사케를 비교하면서 음미해 보길 추천한다.
서빙의 방식 또한 특별한데, 술만 덜렁 내주는 것이 아니라 해당 술에 대한 친절한 설명까지 제공한다. 설명서에는 술의 이름. 술의 종류뿐 아니라 만들어진 지역과 어떤 특징과 풍미를 가지고 있는지까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정도 되면 인스타그램을 하건 안 하거나 간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 '킥'이다.
"トロピな香りで山田錦の旨みがしっかり感じられる。様々な温度で楽しめる(열대 과일 같은 향과 함께 야마다니시키(=쌀품종의 일종) 본연의 감칠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으며, 다양한 온도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이 문구를 접한 나는 '아~ 그렇구나~ 정말 이런 맛일까?'라며 서빙된 술을 조심스레 음미한다. 살짝 아리송한 느낌도 들지만, 설명서를 보니 왠지 그런 것도 같고 묘한 기분이 든다.
4.고객의 예측을 뛰어넘어라
애주가라면 잘 아는 사실이지만, 술은 온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그래서 술마다 가장 맛있는 적정 온도라는 게 존재한다. 맥주는 보통 4~10도, 와인은 실온인 12~15도가 적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케는 다양한 온도로 마시는 것이 가능한 술이다. 차게 마시는 사케를 레이슈(冷酒, Reish), 상온을 히야(冷や, Hiya), 뜨겁게 데워서 마시는 술을 칸자케(燗酒, Kanzake) 이렇게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을 정도다.
크게는 차게, 상온, 뜨겁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좀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5도 단위로 구분하는 11단계 분류법도 있다.
히에(冷え)는 차가움, 히야(冷や)는 상온, 칸(燗)은 데워서 마시는 술을 의미한다. 그리고 히라가나에서 'ㅎ'에 '히에' 앞에 다른 단어와 합쳐지며 '비에'로 발음된다.
유기(雪)는 눈, 하나(花)는 꽃이다. 즉, 유키비에는 '눈처럼 차가운', 하나비에는 '꽃처럼 차가운'이란 뜻이 된다. 참고로 일본의 벚꽃이 피는 3월의 온도가 딱 이렇다. 히토하다(人肌)는 '사람의 피부'라는 의미다. 즉, 히토하다칸은 '사람의 체온 정도로 데운'이란 뜻이 된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시대건 최고의 카피라이터는 존재했구나 싶다.
어찌 되었건 이런 상세한 분류가 있다는 건 알겠고,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건가? 놀랍게도 이 곳은 고객이 고른 사케의 특성에 맞춰 가장 향이 풍부해지는 온도를 추천하고 서빙한다.
사케는 너무 차가우면 향이 닫히고, 너무 뜨거우면 본연의 맛이 날아간다.
기획도 그렇다.
메시지가 너무 차가우면 대중에게 닿지 못하고, 너무 과하게 뜨거우면 금세 식어버린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획은 대개 36.5도, 체온과 닮은 온기에서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만약 내 기획이 이 술 한 잔의 온도처럼 직관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구절절한 수식어 없이도 고객의 입술에 닿는 순간 '아, 좋다'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그런 기획 말이다.
기획자로서 나의 역할도 다르지 않다.
사용자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지점이 어디인지 치열하게 고민해 상품을 고르고, 해당 상품에 가장 적당한 '온도'로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내놓는 일.
술기운 때문일까? 이 공간이 주는 따듯함 때문일까?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맞이한 긴자의 밤거리가 조금은 덜 춥게 느껴졌다.
마치 '긴자의 밤거리'가 내게 묻는 듯 하다.
"당신이 만드는 상품은 지금 몇 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