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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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Tokyo)'란 도시는 알면 알수록 참으로 흥미로운 도시다. 도쿄 하면 맛집, 쇼핑, 디즈니랜드 정도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한편으론 알면 알수록 처음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도시가 바로 도쿄가 아닐까 싶다.
도쿄는 생각보다 섬세한 곳이라서 흥미 있는 테마가 있다면 어떤 것이든 즐길 수 있는 도시다. 각종 테마파크 같은 액티비티 활동을 포함해 오타쿠, 먹거리, 건축, 미술, 음악, 휴식 등 생각하는 모든 형태의 것들이 존재하는 도시가 바로 도쿄다.
도쿄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마루노우치에 위치한 천황의 거처인 고쿄(황궁)다. 이곳은 '러닝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지난 글에서 최근 러닝 열풍에 대해 소개한 바 있는데, 이웃나라 일본은 러닝 문화의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활 체육이 자리 잡아 러닝이 활성화되었을 뿐 아니라 현존하는 마라톤 강국이다. 러닝에 진심인 일본인들에게 러닝의 성지로 불리는 곳 중 한 곳이 바로 이곳 고쿄다. 황궁 주변을 한 바퀴 돈다고 해서 이른바 '황궁런(皇居ラン)'이라 불리는 이 코스는 한쪽에는 고즈넉한 황궁의 성벽과 해자(연못)을 끼고, 또 다른 한쪽에는 도쿄 도심의 화려한 마천루를 끼고 달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코스'다. 경치도 경치지만 한 바퀴를 도는데 걸리는 거리는 약 5km. 러너들에겐 짧지도 길지도 않은 딱 알맞은 거리다. 도쿄 도심의 러너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러닝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도 사전 정보가 없이 도쿄를 방문했다면 '러닝의 성지'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이들을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
황궁런 코스 옆에 위치한 ‘아식스 런 도쿄’에 방문하면 된다. 이곳은 일본의 러닝 문화를 제대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달리기에 필요한 신발, 의류, 장비 등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대여해 줄 뿐 아니라 라커와 샤워실을 포함한 러닝 스테이션도 이용 가능해 여행자들의 질주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다. 아식스 러닝 용품을 판매하는 매장의 역할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러닝 제품을 구매할 수도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발의 형태를 3D로 측정해 꼭 맞는 러닝화를 찾아주는 피팅 프로그램, AI를 기반으로 한 분석 기기를 통해 러닝 자세를 교정해 주는 코칭 프로그램 등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서비스도 받아볼 수 있다. 현지인들이 이곳을 '런 스테이션'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매장 운영시간은 오전11시부터 저녁 9시. 하지만 런 스테이션의 운영시간은 오전 6시 반부터다. 출근 전 황궁런을 한 바퀴 뛰려는 러너들을 타깃으로 한 듯 하다. 런 스테이션 기본 시설 이용료(락커+샤워)는 1회 880엔, 장비가 없으면 렌탈도 할 수 있다. 렌탈 서비스는 아이템당 220엔이며, 의류 세트는 330~660엔, 메타스피드 등 최상급 특정 신발은 550엔의 별도 요금을 내야 한다. 해외 여행객이라 하더라도 아시스런 회원가입만 하면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하다.
'아식스 런 마루노우치(Asics Run Marunouchi)'는 단순한 매장을 넘어, 브랜드의 본질을 어떻게 경험으로 치환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상품기획자의 시선에서 본 몇 가지 인사이트를 정리해 본다.
1. 입지 전략 : 제품의 가장 완벽한 쇼룸은 현장이다
이곳의 최대 강점은 '고쿄 러닝 코스'라는 최적의 러닝 인프라를 브랜드의 앞마당으로 점유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상품을 단순히 진열대 위가 아니라, 실제 사용자의 '맥락(Context)'속으로 슬쩍 밀어 넣는 '넛지(Nudge)'를 활용한 것이다. 보통 매장에선 신발을 신어보고 실내에서 몇 발자국 걸어보는 정도가 고객이 상품을 체험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이곳에선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평지, 언덕, 내리막이 섞인 실전 코스에서 제품의 성능을 즉각 체험할 수 있다. 러너라면 누구나 눈앞에 보이는 신상 러닝화를 당장 하나 구입한 후 나가서 뛰어보고 싶은 심정일테다.
2. 상품 기획 : 버림으로써 얻는 타겟의 신뢰
이 매장에는 아식스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자 패션 아이템으로도 인기 있는 '젤 카야노(Gel-Kayano)' 같은 모델을 팔지 않는다. 오직 러너에 진심인 사람들을 위한 전문 레이싱화와 러닝화 라인업만 파는 일종의 전문 매장이다. 핵심은 '모두를 위한 아식스'가 아니라 '오직 달리는 사람을 위한 아식스'로 타겟을 좁힌 것이다. 상품의 DP 방식도 독특하다. 러닝 페이스별로 제품을 분류해 놓았는데 비러너라면 이게 무슨 분류인가 하겠지만, 러너라면 직관적으로 어떤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역시나 뾰족한 타겟팅 전략이다.
상품기획 시 모든 수요를 잡으려는 것은 모든 것을 놓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다. 상품기획자가 욕심을 버리고 타깃으로 잡은 페르소나의 니즈에 깊게 파고들 때, 브랜드의 진정성이 전달된다.
3. 서비스 기획 : 물건이 아닌 '시간과 편의'를 판매한다
이곳은 오전 6시 30분이라는 이른 시간에 문을 열고, 필요하다면 신발부터 의류, 수건까지 러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대여해 준다. 전략의 핵심은 아식스라는 브랜드를 통한 '러닝 경험'이다. 샤워 시설까지 완비해서 도심이라는 공간과 시간, 복장과 같은 모든 '진입 장벽(Hurdle)'을 제거해 출근 전이나 여행 중에도 언제든 완벽한 러닝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명심하라! 고객은 제품의 스펙보다 자신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 '심리스(Seamless)한 서비스 흐름'에 열광한다.
'아식스 런 도쿄 마루노우치'의 첫인상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마치 '우리는 최고의 운동화를 만드는 브랜드다'라고 말하기보다
'우리는 당신이 언제든 최고의 코스를 달릴 수 있게 돕는 브랜드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이곳에서 나는 또 한 수 배운다.
마케팅과 상품기획의 끝은 제품이 아니라,
그 제품이 쓰이는 '현장에서의 감동'이어야 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