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0303.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켠다. 초저가 플랫폼에서 온 알림이 수십 개 쌓여있다. 암림창 리스트에는 '90% 할인, '1,000원에 무료배송' 등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극적 카피들이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대체 어떻게 이 가격에 물건을 만들고 배송까지 하는 게 가능한 거지?'
알리, 테무로 대변되는 'C-커머스' 초창기. 단돈 2,000원에 바다 건너 집 앞까지 날아온 택배 박스를 보며 받았던 충격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있다. 상품기획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느꼈던 감정은 경외감을 넘어, 묘한 공포감에 가까웠다.
그것은 단순히 저렴한 물건의 등장이 아니라, 그간 스스로 믿어왔던 '가격의 문법'이 통째로 붕괴되는 시그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외감과 공포감은 어느새 익숙함으로 바뀌었다. 초저가 플랫폼은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일상이 되어버렸고, 길게는 한 달씩 걸리던 배송도 이제는 빠르면 3일 안에 도착하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 전 다이소가 역대 최대 매출을 경신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불황을 먹고 산다는 '초저가 트렌드' 속에서 그 선봉에 선 브랜드들의 약진이 유독 눈에 띄는 요즘이다.
왜 '초저가'는 대세가 되었을까?
1.'프라이스 디코딩'과 초합리적 소비자의 등장
과거에는 싼 제품이라고 하면 미끼 상품 혹은 '싼 게 비지떡'으로 낮춰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 소비자들은 좋은 품질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것을 '합리적 소비'라 여긴다. 이들은 제품의 가격을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원가, 유통 마진, 브랜드 가치 등을 암호 해독하듯 분석하는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프라이스 디코딩(Price Decoding)' 트렌드다. 유튜브 언박싱이나 제품을 분해해 보는 '테어다운(Teardown) 콘텐츠' 등을 통해 제품의 제조 공정과 원가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면서, 소비자들은 화려한 마케팅 거품을 걷어내고 제품의 순수한 '상품 가치'를 깐깐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2.'듀프(Dupe)' 소비 트렌드의 확산
비싼 명품이나 유명 브랜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가격은 훨씬 저렴하면서도 디자인과 기능은 유사한 대체품을 찾는 '듀프(Dupe)' 소비가 최근 확산되고 있다. '듀프(Dupe) 소비'란 '복제(Duplication)'의 줄임말로, 명품 등 고가 브랜드 제품과 디자인·품질은 유사하지만 가격은 훨씬 저렴한 '대체품'을 구매하는 트렌드를 말한다. 원조 브랜드 고유의 특징만 차용해 새로운 상품을 기획한다는 점에서 짝퉁(위조품)과는 구별된다. 단순 브랜드 밸류보단 실질적인 상품 가치를 우선시하는 현상도 심화되고 있다.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3,000원짜리 '소용량(쁘띠) 뷰티' 제품들이 인기를 끄는 것 역시 이러한 트렌드의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3.유통업계의 PB 강화 및 구조적 비용 절감
'저렴한 가격'과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동시에 충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블로그나 전문 유튜버들을 통해 정보가 많아진 소비자들이 가성비가 떨어지는 상품을 철저히 필터링하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은 중간 유통 단계와 마케팅 비용, 포장 거품을 대폭 줄인 PB(자체 브랜드) 상품 비중을 확대하여 초저가 상품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매장 내 불필요한 인테리어나 인력을 없애 상시 저가를 유지한다거나, AI와 로봇을 활용해 물류 및 재고 관리 비용을 혁신적으로 낮추는 등 구조적 비용 절감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4.소비의 양극화 현상 심화
초저가 트렌드를 이해하려면 '소비 양극화'라는 더 큰 흐름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요즘 소비자들은 자신이 가치를 두는 럭셔리 제품이나 대체 불가능한 프리미엄 상품에는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하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식음료이나 생필품은 철저하게 가성비를 추구한다. 그 결과, 애매한 중고가 시장이 경쟁력을 잃고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반면 프리미엄 시장과 초저가 시장은 양극단에서 동반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5.고물가 및 장기 불황
물가 상승과 장기 불황으로 인한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 증가는 초저가 소비 트렌드의 근본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얇아진 지갑을 열기 어려워진 소비자들이 가성비 상품을 찾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다. 특히 저렴한 필수재나 가공식품의 가격이 더 가파르게 오르는 이른바 '치플레이션(Cheapflation)' 현상이 심화되면서, 단돈 100원이라도 더 싼 제품을 찾는 '짠소비'가 일상화되고 있다.
몇 가지 성공사례 분석을 통해 시장의 흐름을 알아보자.
1.소용량 & 소분화 전략
이 분야의 선두주자는 다이소다. 다이소는 전체 매장 상품의 80% 이상을 3,000원 이하로 구성하는 강력한 균일가 전략을 펼치고 있다. 특히 용량과 가격을 획기적으로 줄인 10ml 내외의 '소용량 화장품(쁘띠 뷰티)'을 선보이며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유명 명품 브랜드인 샤넬의 제품과 발색이 유사하다고 입소문이 난 3,000원짜리 '아티 스프레드 컬러밤'은 일명 '다이소 샤넬밤'으로 불리며 실질적인 상품 가치를 중시하는 '듀프(Dupe)' 소비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2.AI & 로봇 기술을 통한 구조적 비용 절감
월마트는 AI를 활용해 수요와 재고를 예측하고, 물류 센터에 로봇을 도입하여 인건비 및 배송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초저가를 구현하고 있다. 1,000원도 안 되는 스테이크 햄버거 패티, 파우더 형태의 가성비 영양제(PB 브랜드 '이쿠웨이트') 등 파격적인 가격의 자체 브랜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3.진열과 마케팅 거품을 뺀 PB 매장 구현
독일계 할인 마트 알디(ALDI)는 판매 상품의 90% 이상을 자체 브랜드(PB) 상품으로 채워 마케팅 비용과 유통 단계를 대폭 줄였다. 매장 인테리어를 최소화하고, 상품을 낱개로 진열하는 대신 박스 단위로 매대에 올려 인건비를 아꼈으며, 25센트 보증금 방식의 쇼핑카트를 운영해 카트 정리 인력까지 없앴다. 이렇게 뼛속까지 '저비용 고효율'로 설계된 시스템 덕분에 알디는 경쟁사보다 상시 20~30% 낮은 가격을 유지하며 미국 내 3위 슈퍼마켓 체인으로 성장했다.
4.발품 파는 재미, '오프 프라이스' 유통
벌링턴(Burlington)은 프리미엄 유명 브랜드의 재고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오프 프라이스'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표방한 리테일러다. 특히 매장 DP방식이 독특한 것으로 유명한데, 브랜드별로 구역을 정돈하기보다는 다양한 브랜드를 한데 섞어 진열함으로써, 소비자가 매장을 돌며 직접 좋은 물건을 발굴해 내는 '보물찾기(Treasure Hunt)' 경험을 제공한다. 필요한 시점에 빠르게 재고를 확보하여 재고 회전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고물가 상황에서 더욱 가파른 매출 성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브랜드다.
5.식당·카페를 대체하는 가성비 라인업
최근 880원짜리 우유, 1,000짜리 빵 등 이른바 가격을 상품명으로 내세운 상품들이 많이 보인다. 이른바 초저가라는 속성 자체를 상품의 아이덴티티로 내세운 전략이다. 이 선봉에는 국내 주요 편의점들이 있다. CU는 1,900원짜리 국내산 닭가슴살 시리즈를, GS25는 15년 전 가격 수준인 3,900원짜리 자체 개발 짜장면을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실제로 자체 브랜드(PB) 아메리카노 가격을 1,000원으로 낮춘 한 편의점은 전년 대비 매출이 45% 급증했으며, 특히 젊은 2030 세대의 이용 비율이 130%나 증가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6.'가치 증명'을 통한 원가 투명화 전략
미국의 D2C 의류 브랜드 '에버레인(EVERLANE)'은 제품의 소재비, 공임비, 운송비, 그리고 자사가 취하는 마진까지 원가 구조를 상세히 공개하는 파격적인 '투명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단순히 싼 것이 아니라 가격이 왜 합리적인지를 따지는 '프라이스 디코딩' 소비자들의 민심을 저격하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실제로 도입 이후 약 4년간 연간 100%가 넘는 매출 성장을 기록하는 등 성과를 입증하고 있다.
7.체감형 할인 전략
최근 대형마트들은 기존 9,900원이던 할인 가격을 8,800원 수준으로 더 낮춰 체감 할인율을 극대화하거나, 일반 우유보다 20%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PB 우유를 전면에 내세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프라이드 치킨 1마리를 15년 전 가격인 5,000원에 한정 판매하여 '오픈런' 사태를 유발하는가 하면, 필수 자체 브랜드 식품들을 10년 전 가격으로 판매해 판매량을 전년 대비 3~4배가량 끌어올린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어설픈 품질과 어중간한 가격을 가진 '중간지대'의 브랜드들은 최근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이제 '적당히 좋은 것'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선택과 집중'은 이제 브랜드의 생존 전략이 되어가고 있다.
초저가 트렌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경계를 다시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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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라면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자문해 봐야 할 시점이다.
'내가 고객에게 전달하는 가치가 단순히 '저렴함'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그 저렴함을 압도할 만큼의 '필연적 이유'를 담고 있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