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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영감 Jan 05. 2021

혼자 강릉 여행

1_셀카 찍는 여자

오랜만에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거의 2-3년 만이었다. 20대 초반에는 혼자서도 이곳저곳 잘 돌아다녔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여행 주기가 점점 길어지다가 나중에는 시간이 생겨도 굳이 멀리 여행을 가기보다 그냥 집 근처 카페에서 쉬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여행지로는 이미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도시인 강릉을 골랐다.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니 이왕이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도시를 고를까 고민했지만,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바다 구경과 휴식이었기 때문에 그냥 익숙한 곳을 골랐다.


이후 강릉 바닷가 근처에 저렴한 숙소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강문해변이라는 곳에 저렴한 모텔이 몰려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싼 1박에 2만 원짜리 모텔을 예약했다. 3박 4일 여정이었는데 혹시 모르니 일단 하루만 예약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대략 세 시간 반에 걸려서 겨우 예약한 모텔 앞에 도착했다. 버스를 오래 타서 그런지 이제 방금 막 도착했는데 벌써 피곤함이 노곤하게 퍼지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파도소리를 들으니 오랜만의 여행이라는 생각에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그렇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모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매우 적막했다. 아무래도 비수기여서 그런지 손님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카운터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작은 창문을 열고 짧게 인사를 건넸다. 방을 예약했다고 하니 남자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컴퓨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여행을 가면 낯선 사람에게 말을 자주 거는 편인데, 주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밤을 새운 듯 피곤에 지쳐 보였다. 아니면 하루하루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쳤거나. 어느 쪽이든 지치는 건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305호예요."


그가 나에게 키를 건넸고, 나는 고맙다고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가격이 저렴해서 조금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혼자 쓰기에는 충분히 넓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여행의 시작이 좋았다. 나는 빠르게 가방을 풀고 바닷가 근처 카페에 가서 읽을 책과 간단한 노트를 챙겨 다시 밖으로 나왔다. 카페거리로 걸어 갈수록 파도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카페거리에 도착하니 해변가를 바로 앞에 두고 수많은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3층짜리 대형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역시 거의 텅 비어있었다. 종업원들은 지루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간단하게 요기를 할 빵을 받아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같은 층에 손님은 나를 포함해 다섯 테이블도 없었다. 나는 바닷가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재빨리 빵을 해치웠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은 탓에 배가 많이 고픈 상태였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가만히 바닷가를 구경하다가 방에서 챙겨 온 책을 펼쳤는데 글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러 번 다시 집중하려고 시도했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나는 결국 책을 덮고 눈 앞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해변가 거리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젊은 커플과 가족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저 멀리 해변가에 홀로 서있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와 함께 있는데, 그녀만 나처럼 혼자였다. 자세히 관찰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얼굴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야리야리한 몸에 키가 작았고 긴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바닷가 근처를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더니 바다를 배경으로 본인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수줍은 듯 눈치를 보는 듯했으나, 이내 혼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해수욕장은 비수기여서 한가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사진 찍기에 본격적으로 몰입한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30분 동안 열심히 셀카를 찍었다.


그때 갑자기 한 남성이 나타나 셀카를 찍고 있는 그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인가?'


나는 숨을 죽인 채 남자를 쳐다보았다. 여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내 여자와 거리가 가까워진 남자는 걸음을 서서히 멈추고 그녀를 흘깃 쳐다보다가 다시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는 여전히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남자는 그녀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바다를 구경하는 척하며 계속해서 옆에 있는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확실히 애인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여자도 자기 근처로 온 남자를 인식하고 살짝 부끄러운 듯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마침내 사진 찍기를 멈추었다. 그렇게 한적한 해변에서 두 남녀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정면의 바다를 응시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여자를 힐끔거렸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시선을 의식했을법한 여자도 다른 곳으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바다를 구경했다. 그러나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쯤 지났다. 남자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거기까지가 남자가 낼 수 있는 용기의 최대치인 듯했다. 결국 여자는 남자 반대편 방향으로 아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미련이 남은 듯이. 남자는 자신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볼 용기는 끝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남자도 이내 천천히 자리를 떴다.


그 시간, 그 자리에서 두 남녀는 과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두 사람이 떠난 텅 빈 해변 끝자락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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