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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영감 Jan 12. 2021

혼자 강릉 여행

2_혼자 여행을 온 사람은 거의 다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지

다음날 아침,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모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평일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나야 뭐 백수니까 그렇다 해도,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직업이 뭐길래 평일 아침 이렇게 한가로이 여행을 하고 있는 걸까? 


딱히 계획이 없는 나는 즉흥적으로 어제 갔던 카페거리의 반대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10분 정도 지나자 시끌벅적 떠들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파도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해변가에 오직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국 혼자라는 사실이 조금 쓸쓸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대부분 뭔가 사연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내 경우에는 전 여자 친구와의 이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보여주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나의 정성과 관심에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나와 사귀는 동안에도 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순간에도 전 남자 친구를 그리워했는데, 심지어는 섹스가 끝난 직후 침대에 누워 자신이 전 남자 친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결국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도 예상대로 그녀는 또 한 번 전 애인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 애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하는지"로 변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찝찝하고 슬펐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녀도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데 거기에 대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난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그냥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직후 꽤 많이 힘들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빠르게 그녀가 없는 삶에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내 머릿속 잡념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서 넘어가 다시 현실적인 문제들로 바뀌었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나는 슬슬 본격적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심지어 나는 대학을 늦게 입학했기 때문에 같은 나이의 또래보다 이미 훨씬 뒤처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건 꽤나 벅찬 일이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하는 지도 잘 모르는 나는 직업은커녕 대략적인 방향성 조차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꿈과 열정을 이루기 위한 한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젊음을 바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취업 준비를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어쨌든 자신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겠다는 계획은 갖고 있는 듯했다. 반면에 그런 것들에 딱히 관심이 없는 나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 혼자만 덩그러니 놓인 느낌이었다.


나는 어제처럼 카페거리에 있는 한 카페에 들어가 바닷가가 정면으로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숙소에서 가져온 공책을 펼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20대는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동안 특별히 이룬 것이라곤 딱히 없었다. 학교 생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친구도 없었고 학점도 평균을 겨우 유지한 상황이었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머리가 똑똑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특별한 재주도 딱히 없고,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마침 카페 앞 주차창에서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외제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고급 선글라스를 낀 채 여자 친구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그 남자를 보며 거의 군대 군장 수준 무게에 가까운 여행용 백팩을 메고 여행을 하겠다고 강릉까지 버스를 타고 온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이 스물여덟에 아직도 젊은 척, 세상에 도전하는 척하며 열심히 걸어 다니고 있지만 사실 나도 사실은 저 남자처럼 편안하고 여유 있게 여행하고 싶었다.


젊은 날의 나는 무거운 백팩을 들고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면서도 전혀 기죽지 않았었는데. 오히려 '여행은 배낭여행이지!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 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지금보다 훨씬 당당하게 살았었는데. 거의 8년이 지난 후 현재의 나는 '나도 차만 있었으면 이 무거운 백팩 없이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을 텐데'하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자기 연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자연스럽게 잊고 있던 전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여행을 좋아했던 그녀는 내게 가끔씩 그녀가 찍은 국내 여행 사진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사진 속에 있는 한 자동차가 눈에 띄었다. 그녀가 그 차에 대해서 따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전 애인의 자동차가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그녀는 전 애인과 거의 매주말마다 여행을 갔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나와는 여행을 간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애꿎은 여행용 가방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카페 창가 유리에 얼핏 비친 나의 얼굴에는 어디선가 본 익숙한 그 표정, 바로 사연 있는 표정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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