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 내일부터 차츰 / 그대 생각 덜어내야지...’
2020. 10. 3.
질문술사 시인박씨
추석 지난 후 보름달 심경을 담아봅니다.
코로나 19가 우리의 일상을 깊숙이 침범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저도 밥벌이를 합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만나는 것이 더없이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연초 일정표에 가득 찬 약속들이 하나 둘 취소되었고, 일이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가난해졌습니다. 물질적인 가난함도 큰 일이지만, 마음까지 가난해져서 우울한 밤이 많아졌어요. 그런 밤에는 잠도 설치게 됩니다. 다음 날엔 멍하니 집에서 나와서 갈 곳 없어 무작정 걷다가 동네 카페에 자리를 잡습니다. 카페 사장님도 별로 표정이 좋지 않더군요. 손님이 줄어들고 문 닫는 가게가 거리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한숨 소리가 마스크에 막혀 더 답답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시 쓰는 것 외에는 별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작년 12월에 첫 시집을 출간했는데, 출판사 보기도 민망해졌습니다. 시집이라는 책은 본래도 잘 팔리지 않는 물건인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무슨 수로 팔 수 있을까요? 물론 무능한 가장이라고 구박하는 가족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보처럼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처럼 대하고 움츠러들었습니다. 코로나가 빨리 사라지기만을, 망할 코로나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대부분의 원망이 그러하듯,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지요.
실용적이고 그래도 팔릴 만한 책이라도 쓰면서 버티면 좋으련만, 잘난 척 가르침 담은 그런 글은 더 이상 쓸 수 없었습니다. 이미 약속했던 세 번째 책 원고는 수없이 많은 날이 지나도, 바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쓰여지지도 쌓이지도 않았습니다. 출판사 대표님께 죄송하다고, 다른 주제로 책을 먼저 써보겠다고 호기롭게 양해를 구해도 보았지만,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치고, 집에서도 점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유행하더군요. 당연하게도 저만 겪고 있는 현상은 아니었어요. 이 푸르뎅뎅한 시간 속에서 저는 여전히 실용성 없는 쓸모없는 글을 끄적였습니다.
그 끄적인 글 쪼가리들은 대게 시라고 우기는 짧은 문장들이었습니다. 마흔 즈음에 80개의 질문과 함께 엮어낸 시집은 여태 1 쇄도 팔리지도 않고 있는데, 가을이 오기 전까지 120편가량의 시를 또 썼습니다. 대부분 쓰레기 같은 글이라, 브런치 같은 곳에 올려두어도 거의 읽어주는 독자도 없었습니다. 질문에 관한 실용적인 글은 여기저기 공유되고 많이 퍼져나가지만, 제 시시한 시들은 쌓이고 또 쌓여만 갑니다.
쌀쌀한 가을밤 안도현 시인의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가을밤이 쌀쌀하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가을밤이 쌉쌀하다고 엉뚱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엉뚱한 생각과 말이 세상의 혁명에 기여한다.' _ 안도현 <잡문> p98
제가 끄적인 시를 읽어보니, 관념적이고 관용적 표현만이 넘실거리더군요. 새롭지 못하고, 낯설지도 않으니 당연히 읽히지 않지요. 안 그래도 힘든 이 시기에 머리만 아프게 하는 시, 이 혹독한 계절에 읽힐 만한 글이 아니였습니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주고, 드디어 행복감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나태주 시인은 사랑을 담아 시를 쓰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난 상처에 바를 만한 시를 쓰자고 했습니다.
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제가 왜 시를 쓰는지, 어떤 시를 쓰고 싶어 하는지를 되묻게 됩니다. 물론 저도 '마음의 반창고'같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시집 한 권을 출간했지만 제가 쓰는 시는 아직 보잘것없습니다. 그저 제 자신을 토닥이며 쓸 때가 많습니다. 아직 친구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해보곤 합니다. 언젠가는 반창고 같은 시도 쓸 수 있겠지요. 아직 시인이라고 하기에 부끄럽지만 그래도 시를 쓰는 삶을 살고 있어서 좋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다른 글 일부도 옮겨봅니다.
‘시를 쓰려는 소년에게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관점에서 나 좋을 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듣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을 더 깊고 아름답고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귀가 열린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나 자신까지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나는 또 하나의 타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들이 안쓰럽고 눈물겹고 불쌍하게 여겨질 것이다.’
_ 나태주 <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
시를 쓰는 것은 마음속 사랑을 키워내는 일인 듯합니다. 아직도 작은 새싹이지만, 정성스럽게 키워내다 보면, 풍성한 그늘 제공할 수 있는 나무로 자랄 수 있겠지요. 그때가 되면 단 한 사람이라도 잠시나마 머물며 쉬어갈 만한 시집도 선물할 수 있는, 조금은 덜 부끄러운 시인은 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