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봄 Dec 27. 2023

항복의 천사 방문기

삼봄이라는 어느 광인의 기록


어느 날 눈이 말했다.
"저 멀리 계곡 너머에 푸르스름한
안개에 싸인 산이 보이는구나.
아름답지 않아?"

귀는 들어 보았다.
한참 귀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그런데 산이 어디 있니?
난 안 들리는데."

그러자 손이 말했다.
"만저 보고, 느껴 보려 해도 소용이 없구나.
산이 어디 있는지 못 찾겠어."

코가 말했다.
"산이 있긴 어디 있어. 냄새가 안 나는데."

눈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러자 다들 눈의 이상스런 환시 증세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눈이 뭔가 잘못된 모양이야."

_ 칼릴 지브란 [눈]
  <어느 광인의 이야기> 중에서…




Surrender
항복




  삼 년 전부터, 아니다 30대 중후반 부터 내겐 항복의 천사가 종종 찾아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항복할 때가 되었다고 속삭이고 사라짐을 반복하고 있다.(물론 이건 비유적 표현이니 드디어 삼봄이 미친 건가 걱정하진 마시라, 아 미친 것일 수도 있음을, 그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나의 에고와 일상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다. 아니 깨어지고 무너진 것은 오래 전이나 이제야 무너졌음을 조금씩 인정하고 수용하려 애쓰고 있다.


  나는 내 심장 안에 스며있는 아주 작고 희미하고 보잘것없는 사랑이 내 삶을 이끌어가도록 어느 순간 기쁘게 항복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물론 여전히 저항 중이기도 하다. 아침과 저녁으로 내 의식 위를 점령하는 세력은 수시로 달라진다. 조울증 증상이 매일 나타나고, 별난 벗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거나, 홀로 있을 땐 시를 읽거나 쓰면서 견디고 있다.


  잠시라도 사랑이 나를 이끌도록 허락할 때, 삶의 더 큰 그림이 드러나 잠시 훔쳐보고 우쭐대기도 하나 다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으로 추락하는 일의 반복이다. 또한 나는 그동안 내려놓지 못하고 과거에 짊어졌던 무겁지만 예쁜 돌멩이들을 내려놓을 때가, 아니 예쁜 돌멩이들이 나를 떠날 때가 머지않았음을 지속적으로 느끼곤 한다. 이것이 추측인지 도피적 사고에서 나온 것인지 헷갈릴 때가 더 많다.


  온전하게 세상과 타자와 아름다움을 보는 것, 보다 조화롭게 관계 맺는 것을 방해하는 부정적 편견과 추동도 여전히 내 안에 함께 하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중력처럼 말이다.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들과의 역동에 사로잡힌 내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선 타자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함을 알고 있으나 오만한 나는 여전히 도움을 청하는 일에 서툴다.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에 굴복하여 방어적인 태도로 반응하는 움츠러든 삶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랑이 내 삶을 이끌어가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고 항복해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느낀다. 완전히 항복하는 삶이 과연 가능할지 나는 여전히 도마처럼 의심하는 자이다. 내가 그리고 내 삶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음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랑이 내 삶을 이끌도록 허락할 때 나의 일상은 보다 단순해질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불필요할지라도, 오랜 시간 무의식적으로 붙잡고 집착했던 것을 마침내 포기하고 내려놓고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리 살아보지 않고는, 그런 실험들을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지구별에서의 삶이 어색한 나는, 지구 중력 속에서 인간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내 임무를 다 했다고 오만하게 선언했으나, 여전히 내 삶이 지속되고 있음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https://brunch.co.kr/@sambom/517


  40대 중반이 되어서도 이 무슨 주책이고 이 무슨 망상인가. 삼봄씨는 여전히 눈도 멀어가고 있고, 길을 수시로 잃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죽박죽 엉켜서 기억력도 온전하게 발현시키지 못하는 상태로 더듬더듬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실제로는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난

어느 겨울 밤에 기록된 삼봄씨 이야기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사람에게 아무런 삶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묻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만을 무작정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도는 오히려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행위다.'

_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
매거진의 이전글 봄은 아직 멀리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