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읊조리듯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병률의 문장들이 100만명 넘는 대중에게 팔렸다. 판매 부수가 글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 중 하나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시와 에세이 작가로, 라디오 방송작가로, 또 출판사의 대표로 살면서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 것은 글쓰기보다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몇 병의 술로는 취하는 법이 없어, 함께 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챙겨 보내길 좋아한다는 그와 술 대신 따듯한 차를 사이에 두고 잠시 친구처럼 이야길 나눴다.
이병률에 대한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재벌집 아들’일 것이다.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대학에서 시를 배우고, 시인으로 등단하고, 또 방송 작가로 활동하며, 마침내 백만부를 훌쩍 넘기는 베스트&스테디셀러 작가로 자리 잡기까지,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느껴질까. 잘 정돈된 머리칼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대화 내내 흩날림 없이 편안했다. “어릴 때,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어요. 시인이 되는 꿈은 그 어려운 때부터 품었던 거였고,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꿈을 이루기까지, 시 말고 다른 것이 삶에 없었어요. 돈이 많아서 시를 쓴 게 아니라, 오히려 돈이 없어도 시를 쓴 거라고 해야겠죠. 그리고 시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고요.”
등단 후 첫 시집을 묶어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데뷔 후 첫 시집을 엮어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공들여 쓴 시를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에게도 있었다. 출판사에서 그의 글을 시집으로 내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시집이 잘 팔리지 않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을 겪으며 지금까지 왔다. 시를 쓰듯 라디오 작가로 글을 쓰며, 여행을 하면서도 시를 놓지 않다 보니 지금의 이병률이 되었다. “내게 시를 쓴다는 것은 불안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는데 그들과 달리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에서 내가 해야 할 노력과 나만의 안간힘이 있었다. 시를 쓸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된다.”
그가 시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때부터였다. 공부보다는 시를 쓰길 좋아했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시로 써서 드리곤 했는데, 선생님이 전부 모아두었다가 최근 제게 한 번 읽어보라고 잠시 빌려주셨다. 삐뚤거리는 손글씨로 어릴 적 직접 적었던 시를 끝내 다 읽지 못하고 다시 선생님께 돌려드렸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에게도 있었을까 싶은 설익은 날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것은 가난도 유치함도 아니었다, 그저 온통 시였다.
그는 삶은 여행이다. 지금까지 120개국을 방문했다. 주로 좋아하는 곳을 또 간다, 파리와 삿포로 서른 번 남짓, 베니스 스무 번 등. 그가 쓴 글마다 현지에서 사귄 친구들과의 대화와 붉어진 얼굴 그리고 그리움이 있다. 언젠가 그와 함께 떠날 기회가 있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혼자인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이 내게 알려주는 것은 스스로에게 어떤 결핍이 있는지다.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도 혼자 있을 때 깨닫게 된다. 그 시간을 통해 글도 달라지고 인생관도 달라진다. 꿈틀거리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혼자 있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빚을 내서라도 여행했던 것은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파리와의 첫 인연은 그가 27세가 되던 해였다. 주변엔 유럽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모아뒀던 돈을 털어 떠난 여행에서 그는 2년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이 시간을 그는 ‘농사’라고 표현했다. “차별 속에서 버텼다. 큰 불안을 경험했다. 문화가 달라서나 혹은 학습 가운데 느끼는 충격이 아니라, 스스로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됐다. 혼자 살지 않았다면, 혼자 걸어 다니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일 것이다.“ 그때 그 안에 자라난 단단한 무언가는 지금껏 그가 여행하고 계속 시를 쓰는 원동력이 되었다.
세상에 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책에 글과 함께 실려있는 사진들은 여행하며 놀이처럼 찍은 것이지만, 글이 아니라면 사진에 몰입하게 되었을 거다. 뭐가 됐든 나는 여러 가지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는 걸 좋아한다. 여행도 그래서 하는 것이고, 시도 그래서 쓰는 것이고. 결국 그렇게 사람을 지켜보는 일을 하고 있을 거다.” 언제나 사람을 향하고 있는 그의 시선은 좋은 글의 요건과도 그대로 맞닿는다. “글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내면을 바꾸고, 삶의 방향과 질을 바꿀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심장을 그냥 생명이 붙어있을 정도로만 사용하지 않는가. 심장을 어루만질 정도의 수위를 갖춘 글을 쓰고 싶다.”
그는 계속해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급기야는 사람의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방문엔 진심이 담겨 있다. 그가 스스로 지은 호는 ‘부채’고, 인스타그램엔 ‘섬세한 부채질’이라는 한 줄 소개가 손님을 반긴다. “장작불을 지펴 봤다면 알 것이다. 부채 혼자 요란하게 펄럭이는 게 아니라, 섬세하게 바람을 불어 넣을 때 불이 붙지 않는가. 사람을 들여다보고 지금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할 수 있도록 떠밀어주는 것이 내 글의 역할이면 좋겠다.”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은 어떻게 떠밀까?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또 응원을 빙자한 강요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인지 속으로 다 정리를 마치고야 입을 연다. “글 쓰는 것은 너무 어렵고, 글을 쓰면서 사랑 받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얼마나 고달프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일인지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말을 줄여 담았으니 이대로 전하면 될 것 같다.” 얼마나 부드러운 직설인가.
대화 내내 이어진 여유로운 미소와 대조되는 것이 있었다. 행복이나 성공이라는 만족스러운 단어와의 거리감이었다. 그가 쓴 ‘나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를 통해 본인의 결말을 확실하게 행복으로부터 떨어트려 놓았다. “원치 않는 결말이 주는 것은 안락하지 않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과 이루지 못한 것과 완성하지 못한 것 때문에 계속해서 아파하고. 고민하고. 회상한다.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은 단연 불행이다. 미학적으로도 멋지다.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있어서도 정말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자칫 성공한 시인의 비관이나 염세가 이런 것인가 속아 넘어갈 뻔도 했으나, 그가 어딘가 안주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이해하게 됐다. 그는 성공이나 실패, 행복이나 불행으로 자신의 삶을 정의 내리길 거절하고, 다시 여행하고 매일 사람을 만나는 말 그대로 심장이 통째로 움직이는 사람인 것이다.
“사랑을 할 때,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정말 내가 상대방을 사랑해서 거기 빠져드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 덕에 더 나아진 나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터널을 통과하는 것인가 고민한다. 냉정히 말하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랑을 사용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가 홀로 걷고 있는 그 길이 어디로 그를 데려갈지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다음 번엔 국내가 아닌 해외의 어느 여행지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병률 프로필
2018 제6회 「발견문학상」 수상
2017 바다는 잘 있습니다
2016 안으로 멀리 뛰기 (공저)
2015 내 옆에 있는 사람
2013 눈사람 여관
2013 어떤 날1 (공저)
2012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2012 안녕 다정한 사람 (공저)
2010 찬란
2010 끌림 (2005년 초판본 개정)
2006 바람의 사생활
2006 제11회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2003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1996~2006 MBC FM4U ‘FM 음악도시’ 라디오 방송작가
1995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1988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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