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목적, 그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된 물음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중에 작은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대한민국 땅을 벗어난 나는 정말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란 어렵다. 시시각각 흐르는 매스컴을 통해 온갖 소식이 우리네 귀에 들려오고, 여러 SNS를 통해 눈에 익게 된다. 도무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러한 시류에 따라 유행이란 유행은 한번씩은 접해보게 되어 있다. 그 유행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졸지에 한 걸음 느린 사람이 돼버리기 부지기수다. 유행의 종류는 옷, 노래, 머리모양, 아이템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폭풍 속에서 나 또한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다못해 잠깐 외출할 때마저도 이 옷이 괜찮을지, 머리를 어떻게 할지도 고민한다.
역시나 나는 이번 여행을 가기 전에 어떤 옷을 가져갈지, 어떤 신발을 신어야 할지 따위의 고민을 했다.
캐리어에 차곡차곡 정리를 하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헝가리 땅을 밟았다. 입국게이트를 지나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비로소 현지의 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여행을 떠나오기 전의 고민들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행을 떠났는가?
머나먼 아시아에서부터 날아온 나를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것을 향유하기 위해? 소위 문화적 소양을 쌓기 위해?
정답은 애초에 없었다. 나는 그저 머나먼 타국의 삶이 궁금했으며, 그들을 보면서 내 삶에 있어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길 바랐다.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마음을 가졌던 내가, 해외여행이라는 설렘에 취해버린 것이다. 택시 안에서 나는 외부의 낯선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캐리어에 차곡차곡 짊어지고 온 내 옷가지들이 부끄러워졌다.
다음날, 내가 여행을 오고자 했던 초심을 되새기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지독히도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관심이 없다. 남이 무엇을 입던지, 보던지, 하던지, 비교하지 않고 본인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약자에게는 배려가 있다. 내가 다소 놀랬던 건 오스트리아에서였다. 비엔나 중앙 기차역에서 내려 바라본 풍경은 도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온갖 길목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모든 횡단보도마다 "톡-톡-" 소리로 안내를 해준다. 또한, 청각장애인을 위해 횡단보도를 구분하고자 만든 볼록한 하얀색 보도블록이 눈에 띄었다. 아, 이런 기본적인 것을 감탄하고 있다니, 뒤통수가 얼얼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복지가 왜 우리나라엔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삭막해 보이고 차가워 보이는 길거리에 이다지도 배려가 녹아져 있을 수 있구나. 다시금 느꼈다.
사실 유럽에서의 "친절한 서비스"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동양인인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유창한 영어는 아니지만 식당 혹은 카페에서 주문을 하거나, 길을 물을 때에 그들은 딱 "해야 할 말", "해야 할 일"만 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첫인상은 조금 삭막해 보였다. 외지인인 내가 여행 도중에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마도 "Sorry."일 테다. 또한, 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You're welcome."이다. 천만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나는 내 할 일을 한 거야, 괜찮아.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마냥 친절하진 않지만, 선을 넘지 않는 이들의 태도가 오히려 고마웠다. 나는 이들에게 있어서 수많은 타인 중 한 명이기에, 좀 더 유연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랬다. 낯선 이곳에서 뻗뻗하게 굳어있던 나는 서서히 긴장을 풀어갔다.
지금에서야 생각하지만 외려 이곳이 삭막해 보였던 건 내 착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한편, 체코에서의 일이었다. 관광지의 명소답게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까를교를 지나며, 여러 관광객들과 많은 현지인들을 지나쳐왔다. 낯선 이곳에서도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이곳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지? 여러 관광지를 다녀오면서 일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혹은 숙소 근처나 지나치는 길거리에서 현지인들의 평소 출퇴근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열심히”는 나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한국에서의 “열심히”라 함은 열정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 내 몫보다 더 과중한 몫을 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열심히 “는 그저 적당히, 웃으며, 쉴 때는 쉬어 가며, 본인의 몫을 묵묵히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갔던 식당, 카페, 호텔, 모든 곳에서 말이다.
한국에서의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가? 열심히 일해왔는가? 정말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되물어봤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여행이 끝나면 시원스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여태껏 살아온 삶에 대해서는 부끄럽지 않다. 지난 8년간의 노동, 회사 생활은 정말 부단히도 열심히 해왔다. 허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은 잘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기” 식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살아왔기에, 소위 동족혐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여행을 결심한 걸지도 모른다. 지난 회사생활을 돌이켜보면 타인에게 보이는 내 모습을 안위하고자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진짜 나를 사랑한다면 어땠을까? 남에게 보이는 내 모습은 둘째 치고, 스스로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에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