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만 같아라
묻는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에게 묻는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무엇인가, 죽을 때까지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는데, 고를 권리를 주어진다면 나의 선택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고, 누군가와 외딴섬에 남게 되는 일. 그런 질문에 답을 할 때면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는 때가 많다. 큰 범주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답이 다르다. 상위권에 올라있는 것들이 있어도 압도적이고 불변의 1위가 없는 것이 또 나를 탓하게 하는 요상한 흐름. 충심과 순정이 부족한 나라서 이런가 생각이 수렴하는 것이다.
제철 과일. 나는 국민학생 때 계절과 과일을 연결하는 시험문제를 받아온 사람이다. 임산부 마음에 딸기가 떠올라버린 한겨울, 남편이 딸기를 찾아 도시를 탐색하는 이야기가 흔치 않게 돌았고, 그때마다 뒷 이야기가 궁금했다. 마침내 구해왔다고 하면, 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새벽까지 애를 써도 결국 소득이 없었다면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지키지 못한 열패감에 예비 아빠는 고통받았을지, 천만 다행히 임부의 입맛이 싹 사라졌는지, 그런 것이 궁금한 것이 국민학생 나였다. 어쩌면 지금도.
무서워서 확인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보게 될까 봐 두려워 덮어두는 진실. 딸기가 어느 철의 과일인지 아이들에게 묻는 것을 피한다. 모르면 나의 낭만이 부서질 것을 염려하여 그렇다.
90년대에 오이를 먹을 때는 끝부분 1센티는 잘라내야 했다. 참외 역시 그렇다. 머리꼭지와 궁뎅이는 써서 먹을 수 없게 쓴 맛이 나서. 어느 소설 구석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됐는데, 과학적인 배경인지 작가적 상상인지는 모른다. 뜨거운 볕에 한 껏 성이 나서 그렇게 쓴 맛이 나는 거라 했다. 노지에서 자란 것을 만나기 힘든 탓도 있고, 기술 발전으로 그때만큼 기다림이 필요 없어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이를 손질할 때, 참외를 깎을 때 너무 아쉬운 마음이 아릿하다. 일 센티씩 잘라내던 아쉬움이 이제 자를 필요가 없어서 서운한 건, 그냥 이상 성격이면 어쩌나.
나는 딸기도 좋아하고 배도 사과도 좋아하지만, - 아… 수박도 빠질 수 없지 - 색다른 연유로 나의 애정을 붙들고 있는 친구가 있다. 가을에만 만나는 그것. 단감. 단감이 단감인 것은 단단해서인지 달콤에서 인지 알고 싶지 않다. 나무에서 뗀 그때만 단단할 수 있는 감이 참 좋다. 약간의 시간을 덧입어 극강의 단맛이 올라오는 말캉할 때도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나는 홍시는 정말로 싫어한다. 단감의 단단함과 달콤함 둘 중에 하나만 남길 수 있다면 단연코 단단단 감이다. 사과보다 아삭하고, 배 같은 과즙이 없어도 더 달달하여 나는 가을이면 배가 미어지게 단감을 먹는다. 나는 글을 쓸 수 있어서, 과하게 단감을 먹는 나 스스로도 이렇게 변명하고 포장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방금 단감 한 소쿠리를 와작와작 소리 내어 먹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른 계절에 가을이 저물며 만나는 이 주홍이를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나에게는 제철에만 만나는 애틋한 관계가 너무 사라져 버려서, 이것이 소중하니까. 나는, 언제나 누구나에게 닿을 수 있는 에스엔에스를 대단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 알겠다. 누구도 보고 싶은 적이 없어서 인가 -인간 감각실격자의 면모지만- 언제든 닿을 수 있음은 더욱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외국으로 떠나면 목소리 한 번 듣기 힘든 그 시절의 사랑이 훨씬 애틋해서 맑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일까. 상대에게 갖는 믿음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어서 의심이 솟는 일도 많고 배신의 아픔으로 쓰려져야 하는 위험도 많겠지만, 나는 안전하기 위해 낭만을 버리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서 그렇다. 그리고 다들 그렇지 않을까.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별 것 아닌지, 나의 열망은 모두 결핍에서 온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얻지 못할 것이 없게 되면 우울과 무기력뿐 아닐까.
이미 바람이 세지고 아무리 잘 둬도 단감은 물러지고 있다. 더 무너지지 않도록 얼른 다 먹고, 내년을 기다릴까 한다.
감. 너는 훌륭해. 까치밥이 될 수 있는 여유와 물러서도 새로운 가치를 찾는 너, 내가 언젠가는 홍시도 탐닉할게. 가을에만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