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가장 사랑했지만

1부 1장 가장 사랑했지만

by 투명물고기



남산외인아파트를 기억한다.

도시의 산허리를 가린 죄를 물어,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파되던 날.

10, 9, 8…, 2, 1, 꽝—

격앙된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산의 허리춤에 흰 연기가 솟구쳤다.

어린 나는 그 무너짐의 슬픔을 알지 못했다.

유난히 하얀 먼지 구름.

그 풍경이 예뻐서 잠시 췄다가, 그 안으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스르륵—

붕괴는 한 번에 일어나지 않았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도 잠시, 아무 일도 없는 그 틈.

그 정적이 내 인생의 복선이었다.

무너짐을 알아채는 건, 언제나 조금 늦는다.


실체는 떠난 뒤에야 드러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서로에게 무엇이었는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중심에서,

한쪽에서 새어 나온 빛이 반대편 문으로 빨려들던 그 순간들.

그때의 나는 세상에 속하고 싶어서,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졌다.

모든 감정은 지나고 나서야 이름을 얻는다.

행복도, 사랑도, 그 순간엔 모른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는, 감정을 뒤늦게 해석하며 살았다.


나는 ‘런바디 공주님’이다.

구겨진 자존감을 이고, 고도비만을 이겨낸 여성의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흥미롭고, 동기부여에 알맞은 서사다.

그 시절 나는 인정받고 싶어 매달리면서도,

사랑받는 내가 진짜인지 늘 의심했다.


삑—

새벽 네 시, 24시간 헬스장의 문이 열리고

하루의 역할을 시작하기 전까지 아침 운동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인증샷을 채팅방에 올릴 때면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쪽 세상에서 역할을 해내고, 저쪽 세계의 공주로서.

모든 역할을 완벽히 해내고 있다고 믿으며 도취되어 있었다.

약에 취한 것처럼, 중독처럼, 점점 속도를 높였고 —

중요한 일과 급한 일,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분간하지 못했다.

몸이 세워져 간다고 생각하는 동안 정신이 무너졌다.


그때의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하였다.

아니, 자랑스러웠다는 말이 더 맞겠다.


마트에서 카트를 끄는 팔뚝엔 혈관이 도드라졌고,

힘을 주지 않아도 허벅지는 멋지게 갈라졌다.

낯선 곳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

움직임을 따라오는 스팟라이트,

명품도 없이 강남대로를 걸어도 당당했다.

뚱뚱해서 주눅 들었던 내 시간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부러 외면하던 옹벽에 금이 가고,

그 틈새로 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회에서 부여받은 역할 모두 완벽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몰아치면서,

남다른 사람이 되기 바랐다.

원더우먼이란 건 없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길을 잃었다.

애초부터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걷고 있었다.

길은 있었지만, 목적은 없었다.

‘왜’의 상실.


늘 칭찬과 감탄을 듣는 여자는 항상 밝게 웃고 있다.

하지만, 왜 웃느냐는 기습적인 질문에 미소가 사그러든다.

‘사람들이 멋지다고 해서요.’

떠오른 말은 도저히 입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는 단단히 벼려진 나를 사랑했다.

행복했냐 묻는다면, 행복했지만—그건 행복이 아니었다.

소주가 쓰지만, 쓰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둔감해질수록,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멀어져 있었다.

지켜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시인과 촌장이 노래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그땐 뽐낼 수 있어서 나를 사랑했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다.



결국 나는 지키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