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장 너는 나에게로 와서 안심이 되었다
학창 시절, 광화문 교보문고는 나의 쉼이자 나들이였어.
교보빌딩 전면에 나부끼던 커다란 현수막이 읽어주는 시 한마디는
멍든 마음을 다독이고, 소망이 자라나게 했는데,
너를 만나 그때가 생각났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는
강가에서 시를 쓰던 그 시인의 말은
바람과 비를 맞고 들판에 서 있는 내게 꽤 큰 위로가 되었던 거야.
나는 늘 온실 속 화초가 부러웠는데,
그 시는 나에게 “네가 꽃이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
그 후로도 칼바람 같은 시련이 온몸을 얼릴 때면
온실의 화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하지만 너는 내게 말했지.
내가 걸어온 그 길 덕에 아름답고,
작은 마음도 소중하게 받을 수 있는 내가 된 거라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무엇도 부럽지 않아.
너는 내가 야생화라서 사랑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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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김춘수의 「꽃」은 말이야,
내 로맨스에 호호, 희망을 불어넣은 시였어.
들판에 나붓이 앉아서 누구인지 모를 너를 기다리는 게
두근거림이었는지, 내동댕이쳐진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음성이 언젠가는 들려올 것만 같았거든.
봄볕에 말라붙은 흙냄새가 그리움처럼 늘 코끝을 맴돌았어.
누군가 언젠가 나를 불러 주겠지.
나는 냉큼 달려가서 그의 꽃이 될 채비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
오지 않는 너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못난 나를 탓한 것,
너는 벌써 다 알고 있지?
나는 네가 나를 불렀다고 믿었어.
그렇게 따뜻한 건 분명히 마음이니까.
하지만 내가 몇 번을 물어도, 너는 매번 나에게 미루더라.
내가 너를 불러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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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말이면 뭐든 믿고 싶어서
주체와 객체를 바꿔 입속에서 굴리다 보니, 뒤통수가 얼얼해졌어.
나를 불러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마음,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몰랐던 거야.
네가 나를 부르자, 그 우연이 나를 꽃으로 만든 게 아니라
이미 꽃인 내가 애타게 너를 부르고 있었구나.
너의 부름보다 나의 소망이 앞섰구나.
소리가 나지 않는 애타는 부름이 네 귀에 닿았구나.
서로의 주변을 감싸던 울림이 기어코 서로의 마음에 들어갔을 때,
누가 부르고 누가 답했는지는
결코 알 수 없게 된 거야.
흘러가던 바람이 들른 김에 우연히 쉬어간 게 아니야.
우연을 운명으로 엮어낸 나의 애타는 바람.
누군가 고개를 돌려 무심히 봐주기를 바라는 대신에,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외쳐온 거야.
나,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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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한 적도, 꿈꾼 적도 없는 나에게
너는 치유의 시간을 건넸어.
그러고도 너는 이 세상에 나뿐이라고,
이 모든 것이 너에게도 놀라운 기쁨이라고,
고민하는 법도 없이 분명히 들려줬어.
너는 스스로 배타적인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며
사랑 고백을 미루었지.
하지만 나는 원망하지 않아.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런 기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를 짓고 노래하고 싶어.
네가 아주 보통의 존재라면
김춘수가 노래한 꽃으로 갈음하겠지만,
자진하여 나를 부를 수 없는 네 덕에,
나도 시인이 되었어.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면,
너는 나에게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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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상은 온통 불안뿐이라고,
나의 부름에 단숨에 내게로 달려오는 너는
어김이 없으니 안심이야.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안전을, 너에게서 배워.
너는 나에게로 와서,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