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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도리 Apr 12. 2024

비 오는 도쿄에 다녀왔습니다_2

계획대로 안 풀리는 퇴사 여행기2

도쿄 여행 둘째 날이 밝았다. 후지산을 보러 가기 위해 신주쿠 숙소에서 가와구치코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전날 비가 오고 날이 흐렸던 탓에 오늘 날씨에도 걱정이 많았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인가.


가와구치코는 높게 솟은 후지산을 배경으로 수평선의 가와구치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풍경 명소로 유명하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풍경 명소인 만큼 맑은 날씨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런 가와구치코역에 내리자마자 뿌연 운무가 자욱하다.



조금만 흐려도 후지산을 보기가 어렵다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직감했다.


'망했다'


설상가상 하늘에선 비까지 우수수 떨어진다. 후지산을 볼 수 '없는' 최악의 날씨가 아닐까 싶었다. 평년 날씨가 따뜻한 4월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린 탓인지 쌀쌀함을 넘어선 추위가 나를 밀어낸다.


후지산 스팟으로 유명한 로손편의점.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두 시간이나 걸쳐 도착했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급한 대로 날씨에 맞설 수 있는 전투복, 우비를 구입하러 편의점에 들렀다. 눈에 보이는 우비를 집어 들고 계산을 마쳤는데 뒤늦게 'M' 사이즈가 눈에 띈다. 추운 날씨에 겹겹이 껴입은 옷 덕분에, 타이트한 슬림핏 우비 코디가 완성됐다.



날이 맑으면 전기자전거를 대여해서 평온한 자연을 만끽하며 호수를 산책하려고 했었다. 비가 오고 춥긴 하지만 전투복까지 갖춘 마당에, 계획대로 자전거를 빌리러 대여점으로 향했다.



보기엔 일반 자전거와 비슷하지만 전기모터가 장착되어, 페달을 조금만 굴러도 쌩쌩 달려 나갈 수 있다. 우리나라의 카카오바이크와 같은 녀석인데, 나름 전자장비까지 장착되어 든든함이 느껴진다.



출발한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손이 너무 시리다. 4월의 비 오는 가와구치코는 정말이지 너무 춥다. 손이 빨갛게 달아올라 여행을 온 건지 혹한기 훈련을 온 건지 정신이 혼미하다. 같이 온 6년 지기 친구도 점점 말수가 줄어든다. 그래도 여자친구와 온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날이 무척이나 안 좋았지만 안개가 내리 앉은 호숫가에서도 나름의 낭만이 느껴졌다. 원래는 뒤편으로 후지산이 보였을 텐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안개 덕분에 좀 더 호젓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잠시의 낭만을 뒤로하고 차가운 속을 달래기 위해 뜨끈한 점심을 먹으러 왔다. 가와구치코의 명물인 '호우토우'. 야채를 넣어 끓인 우리나라의 전골과도 같은 메뉴인데, 수프카레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된장을 풀어낸 수제비 같기도 하고, 구수하고 깊은 풍미의 국물이 정말 맛있었다.


호우토우가 맛있었던 'Tsujiya'


뜨끈한 식사를 마치니 조금은 힘이 난다. 역시 여행보다는 혹한기 훈련으로 생각하는 편이 정서관리에 이로울 것 같다. 다시 열심히 페달을 밟아 다음 목적지인 '오이시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비 오는 거리의 한적하고 고즈넉한 정취가 느껴졌다. 어쩌면 흐린 날씨 덕분에 외부의 풍경에 집중하기보다, 페달을 굴리며 내면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마침내 도착한 오이시 공원. 역시 후지산 풍경 스팟으로 유명한 곳인데 희뿌연 안개만이 가득하다. 도착한 것에 의의를 두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밖에서도 고소한 빵 냄새가 가득했던 한 베이커리 가게. 좌석을 오픈하지 않은 탓에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가옥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물이라 사진으로나마 기록했다.


빵냄새가 가득했던 'Lake Bake Cafe'


공원 근처에는 이런 가옥 구조의 상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간단하게 기념품을 구입하거나 커피를 한 잔 즐기기에도 좋아 보였다. 비 오는 날의 정취도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슬슬 코가 얼얼해질 정도로 추위가 느껴졌다. 돌아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가볍게 한 잔 하며 잠시 쉬어갔다.



호스텔의 라운지 같은 느낌이 나는 한 카페. 추운 날씨 덕에 다들 따뜻한 음료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일본에 왔으니 말차라떼를 한 잔 주문했다. 당도가 없는 고소하고 슴슴한 맛이 매력적이다. 일본은 어딜 가나 커피에 진심인 곳들이 많아서 좋다. 직접 원두를 로스팅해서 제공하는 곳들이 대부분이고, 본인들만의 가치와 철학을 한 잔에 담아내는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곳들이 많아 다음에는 카페투어로 여행을 와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소하고 슴슴한 맛이 매력적인 말차라떼


카페투어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이제 신주쿠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열심히 다시 페달을 굴렀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름 네 시간이나 자전거 투어를 다녔으니 이제 미련이 없었다.



자전거 대여점에 다 와 갈 무렵, 뒤따라 오던 친구 자전거에서 '팡!'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친구가 뒤따라오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더니 기다란 뱀 같은 자전거 체인을 들고 나타난다.



자전거 체인이 힘없이 끊어졌다. 황당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렇게 한 번씩 최악을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다행히 대여점 5분 거리에서 발생한 일이라 묵묵히 자전거를 손으로 끌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가장 기대했던 일정인데 정말이지 예상대로 되는 일들이 하나도 없었다. 전설의 복서 마이크 타이슨이 남긴 '누구나 계획은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이라는 어록이 가슴깊이 와닿았다. 역대급으로 흐리고 추운 날씨로 열심히 '쳐 맞은' 여정이었지만, 그만큼 누구도 쉽게 보지 못한 풍경을 눈에 담아왔으며, 자전거 체인이 끊어진 웃지 못할 추억거리도 남겨왔으며, 무엇보다 일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그 상황을 온전히 즐기는 경험을 안고 돌아왔다.



퇴사 후 앞으로의 여정들도 이번 에피소드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나름의 계획은 있지만 분명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날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번 가와구치코 여행을 추억처럼 펼쳐보고 싶다.


강력한 기억을 남긴 도쿄여행 둘째 날을 마치고, 내일이면 벌써 마지막 일정이 시작된다.

.

.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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