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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06. 2023

도대체 어디서 굴러왔는지,

[ㄱ] 굴러오다
곁에 있는 게 신기하기만 한 대상한테 쓰는 표현


  초등학생 때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란 주말연속극이 있었다. 우리 집 텔레비전에서 가끔씩 흘러나왔던 걸로 기억하나 특별히 떠오르는 장면은 없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를 잊지 못하는 까닭은 이 드라마를 통해 '굴러오다'란 단어를 익혔기 때문이다. '굴러오다'는 당시의 내겐 생소한 말이었다. 언니와 이불 깔아놓고 앞 구르기, 뒷구르기한 게 가장 먼저 그려졌지만 '구르다'와 '굴러오다'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저기 있는 언니한테 앞 구르기로 다가가는 경우, "동생이 앞 구르기로 굴러왔다"라 써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어째 어감이 달라 보였다.


  "넝쿨째 굴러왔다"란 표현이 어린 내게는 마냥 웃겼다. "사람이 어떻게 넝쿨이 돼서 굴러와?" 이해가 안 돼서 까르륵 웃었다. 이후, "어디서 이런 애가 굴러왔어!"라는 호통을 또 다른 드라마에서 들었다. 이 드라마는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마찬가지로 주말연속극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 대사까지 입력이 되고 나서야 '굴러오다'란 말은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깔보며 쓰는 표현"이란 걸 익혔다.


  지금은 '굴러오다'란 단어가 익숙해질 정도로 자주 써먹는다. 우리 집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가 들어와 있어서가 아니다. 멍멍이와 동고동락하면서 '굴러오다'란 정의 또한 바뀐 것이다. 우리 집에는 "어디서 굴러온지 모르겠는" 멍멍이가 살고 있다. 나의 1순위 절친이자, 오랜 외로움을 한 방에 물리쳐 준 든든한 존재이자, 널 위해 언어를 배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애정이 끊이지 않는 동생이다.




  멍멍이의 탄생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듣기만 했다. 지금이야 유기 동물 보호센터의 존재와 <사지 말고 입양하자>란 문구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만 멍멍이가 태어난 해에는 그런 인식이 밑바닥 수준이었다. 멍멍이는 언니가 강권을 휘두르며 기어이 데려온 생명체이다. 그래도 언니 딴에는 나름 알아보겠다고 펫샵 대신 어느 가정집에서 데려왔다. 펫샵을 거부하는 이들을 노리려고 '가정집 분양'이란 속임수 또한 펫샵 못지않게 성행한다는 건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그러니 언니와 연락을 주고받은 이의 말을 100% 신뢰하지 못하겠지만 들은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인터넷에 분양글을 올린 사람은 모견의 견주이다. 엄마 강아지는 중형견이나 아빠 강아지의 덩치가 작은 편이라 자견들 또한 작게 태어났다. 멍멍이는 충청도 토박이인 우리와 달리 인천광역시의 어느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원래 언니가 염두에 둔 건 다른 강아지였는데, 몇 시간 달려 도착했더니 비실비실한 멍멍이만 입양자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멍멍이는 힘에서 밀려난 터라 어미의 젖을 먹지도 못해 기죽은 채 구석에 있다. 언니는 여기까지 온 게 아쉬운 데다 하루빨리 강아지를 데려오고 싶어 이 멍멍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렇게 멍멍이는 2016년에 우리네 식구로 편입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무서워했지만 지금은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앙칼진 소리를 낼 만큼 기세등등하다.


  멍멍이가 "어디서 굴러왔는지" 이처럼 아주 잘 알고 있다. 멍멍이는 인천광역시의 가정집에서 태어나 고속도로를 달려 우리 집에 당도했다. 그런데도 콩깍지인지 뭔지, 그 정확한 탄생을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너는 어디서 굴러온 거야?"라며 자꾸만 말을 걸게 된다. 내 머릿속에서 멍멍이는 신화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알을 톡 깨 나오고, 갑자기 눈 떠 보니 내 앞에 존재를 드러내는 등 레퍼토리는 매번 다르다. 멋대로 멍멍이의 탄생을 새로이 쓸 만큼 멍멍이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르는" (사실 믿고 싶지 않은) 신비한 존재다.




  지금은 이리 말하지만, 멍멍이가 집에 오고 한동안은 '어사'였다. 늘 집안에 혼자 있다가 꼬물꼬물 돌아다니는 존재와 지내려니 기분이 요상했다. 가족이 반대했던 이유도 멍멍이를 보살피는 데 드는 비용보다 언니가 책임 안 지리란 예상에서였다. 언니의 욕심과 그로 인한 뒤처리를 지겹게 반복해 왔으니 예상은 역시나 현실이 됐다. 언니는 데려만 오고 책임은 지질 않았는데 강아지만큼은 다른 사고들과 달리 내가 감당할 몫이 되었다. 엄마는 회사, 아빠는 타지, 언니는 밖에만 나돌아 다니니 나만이 이 꼬물이를 돌봐야 했다. 멍멍이야 내 눈에도 마냥 깜찍했지만 '보는 것' '함께 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웬 생명체가 버젓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16살의 나는 '책임감'이란 걸 익혀야 했다.


  멍멍이에겐 배운 게 참 많다. 동생이자 친구면서 스승이기도 한 셈이다. 멍멍이를 통해 강아지란 동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강아지를 넘어서 '동물권'이란 개념을 새로이 인식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에도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 누구보다 돈이 중한 주제에 동물권ㄷ 단체 후원은 멈추지 못할 만큼 멍멍이로 인해 사람 외의 생명체에게도 도움 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온전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음을,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금방 기 회복 수 있음을 알았다. 내 투덜의 원인을 멍멍이는 알지 못한다. 내가 서운한 게 있어도 알 리 만무하다. 내 마음을 이해하려는 대신 에잇! 애교나 부려댄다. "예끼! 그런 짓 하지 말랬지!" 혼내킨들 삐지는 건 한 1분? 금방 내 옆에 와서 궁딩짝을 착 갖다 댄다. 멍멍이와 있으면 화내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실감할 수 있다. 사랑하기도 부족한 시간에 화를 내서 무엇하리!


  '굴러오다'의 용례  
1) 멍멍이가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르겠다
2) 멍멍이가 내게 굴러와 줘서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반 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사였지만 멍멍이는 날 지켜볼 수 있는 내 방을 고집했다. (10대 때 쓰던 방이라 촌스럽지요? 멍멍이의 뻗은 자세만 봐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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