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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07. 2023

그냥 달리기 말고, 나만의 달리기

[ㄷ] 달리다
(시간제한이 없는 경우) 몸과 마음을 개운하게 만들 수 있으며 돈도 안 드는 운동  


  마라톤 선수가 꿈이었던 아빠에게 민망하리만치 달리기엔 영 소질이 없었다. 초등학교 운동회날, 가장 싫었던 것도 '달리기'였다. 하이라이트나 마찬가지인 계주 달리기 말고 전원이 출전하는 일반 달리기에도 시선이 쏠리기는 매한가지였으니.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친구들의 형제 손을 잡은 채 친구가 몇 위로 들어오나 지켜보면서 응원해 주었다. "탕!" 총소리가 울릴 때마다 다섯 명이 각자의 라인에서 일제히 뛰었다. 나는 언제나 5위, 운 좋으면 4위를 했다.


  먼저 골인점에 들어간 친구들이 환호하며 가족들과 짝짜꿍 하고 있을 때, 헉헉거리며 그들의 기쁨을 감상했다. 선생님들은 풀 죽은 내게 수고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만 도장이 찍히지 않은 허전한 손등을 보니 더 풀이 죽었다. 친구들 손등에 선명히 남은 1에서 3까지의 숫자가 운동회 끝날 때까지 그리도 부러웠다.


  어느 날 생긴 질투도 아니고, 6년 동안 꾸준히 쌓여 온 시기(忌)는 자극으로 바뀌었다.


  6학년 때는 체육 선생님에게 "자주 걸으면 달리기도 빨라진다는 게 진짜예요?"라 여쭤보았다. 1년 전에 새로이 이사 간 집 앞엔 하천가가 있어서 혼자서도 산책하고 가족들과도 산책하던 때였다. 그런 내 귀에 위와 같은 가설이 들어오자 체육쌤에게 확신을 받고 싶어졌다. 선생님은, "당연하지! 걷다 보면 달리기도 당연히 빨라진다"며 '당연'하다는 걸 강조하셨다. 그 후로 더 많이 걸었건만 중학교 올라가서도 학급 내 꼴찌 신세는 면하지 못했다. 소문난 뚜벅이인 엄마가 나보다 달리기가 느리다는 데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운동회는 계주들만의 레이스로 좁혀졌다는 점이었다. 계주 선발 테스트와 체력평가 때만 달리면 됐다.




  경주(競走)의 설움은 안 겪어도 됐지만 16살엔 달리는 데에 이까지 갈았다. 진짜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옆 친구를 앞질러 보고 싶었다. 계주 선발 때건 체력평가 때건 '시간 측정'이 이루어졌으며 보통 두 사람씩 달리게 했다. 5명 중 5등인 것보다 둘 중 패자인 게 더 멋쩍었다.


  중3 겨울방학, 고등학교 입학 전에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달렸다. 집 앞 작은 하천가가 아니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이어지는 큰 하천가를 택했다. 동네 하천가는 길이 하나였지만 다른 하천가엔 자전거 도로까지 길이 개로 나뉘어 더 편해 보였다. 걸어서 40분(왼쪽 방향을 고를 경우)에서 1시간(오른쪽 방향을 택할 경우) 되는 거리를 날마다 뛰며 잘 달리기 위한 연습을 했다. '하천가 달리기'는 그해 딱 그쳤다. 17살이 되자 신기하게도 잘 달린다는 소리를 다발적으로 들었다. 선생님, 정답은 그저 달리는 거였습니다! 물론 그간의 걷기가 체력을 높여준 게 있으니 달리기 연습도 수월했으리라.


  목표는 '꼴찌 탈출'이었으니 계주 욕심까지 내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선 자진 지원을 받아 그 애들끼리 다시 뛰게 했다. 19살 돼서는 지원 가능한 기록을 찍었으나 패스했다. 운동 신경의 한 요소인 순발력도 없다 보니, "탕!" 소리에 곧장 다리가 안 나가는 치명적 단점 때문이었다. 초중고 거쳐 오며 유일하게 고치지 못한 게 "탕!" 하자마자 달리는 거였다. 그래도 달리기가 확실히 빨라져서 출발이 1초 늦은들 옆 친구를 앞지르는 건 매번 가능했다.




  하천가 달리기를 멈춘 이유는 자만에 빠져서가 아니라, 하천가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달릴 일은 매일 찾아와서였다.


  고등학교 앞을 지나는 버스는 두 대뿐이었고, 이 버스로 오고 가려면 시내나 대학가에서 환승해야 됐다. 야자가 필수가 아니라 곧장 귀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버스 정류장에 가면, 정류장의 3배 가까이 되는 면적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버스가 저 멀리 보이는 순간부터 먼저 올라탈 수 있는 자리를 선점하겠다고 난리였다. 바로 다음 정류장인 대학가를 지나면 탑승객이 더 불어나서였다.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가야 "아, 좀 들어가요!"라는 짜증을 듣는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는 학교가 더 일찍 끝났다. 담임 선생님이 간혹 점심 전에 종례를 해주시는 경우, 나처럼 집이 먼 학생들은 곧장 튀어나가고 싶어 했다. 오늘만이라도 앉아서 가겠다는 심산이었다. 하나 버스 배차 간격이 긴 탓에 도착 시간은 언제나 촉박하거나 지나치게 늦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밥도 못 먹었는데 정류장에서 한참 기다리다 인파에 치이는 수가 있었다. 계산을 잘해야 했다. 나와 친구들은 <곧 있으면 도착인 앞 버스>를 타자는 데 입을 모았다. 선생님 나가시자마자 교실에서 정류장까지 10분은 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 버스에 올라탔다. 이 순간만큼 달리기 연습하길 잘했다는 만족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고3 돼서는 반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했다. 술래잡기란 낙이라도 있어야 됐다.... 운동장이 주 경기장이니 달릴 수 있는 면적도 넓었다. 버스와 술래잡기, 이 두 요소가 간신히 일군 달리기 실력을 유지하게 만든 일등공신들이었다. 대학 가서도 통학 생활이 이어졌으니 버스 때문에 달려야 하는 순간은 그치지 않았다. 보통 혼자 뛰었지만 누군가(바래다주려는 착한 이들, 터미널 가야 하는 친구들)가 곁에 있을 때도 있었다. "어쩜 그렇게 빨리 뛰어?" 이 질문을 자주 들었다. "폼 자체가 선수인데?" 이 소리는 23살에 들었다. 17살부터 새로 쓰인 달리기 제2막의 역사가 드디어 선수 같은 자세란 새로운 성과를 달성한 모양이었다. 아부지, 자랑스러우신지요!


  달리는 순간이 많진 않았다. 시외버스는 일정한 시간에 오고 좌석 또한 정해져 있으니 조급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다만 원래도 늦게 끝내주시는 교수님이 더 늦게 끝내주실 때는 매번 뛰었다. 이 경우는 하필이면 수업 시간대도 문제 요소였다. 다음 버스 탔다간 퇴근길과 딱 겹쳤다. 하염없이 도로에 갇히는 손해를 맛보고 싶진 않았다. 가뜩이나 탈탈 털려 힘든데, 조금이라도 편히 가고 싶은 마음에 미친 듯이 뛰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욕이 절로 나왔다. 20분 거리를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100M 달리기' 수준으로 달리려니 교수님 원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사실 종종 발화도 됐다.)




  계절학기 수업을 듣고 터미널로 향하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 끝난 시간이 퇴근 시간대와 겹치지 않아 여유롭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뛰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평소에 입던 롱패딩 대신, 새로 산 '첫 야상'을 개시한 날이기도 했다. 달리고 싶으니 달려 봤다. 야상이라 몸도 가벼운 게 느껴지자 속도는 더욱 높아졌다. 숨찬 것보단 마스크 안으로 미소가 번지는 게 더 크게 느껴질 만큼 기분이 확 고양됐다.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도 더 달리고 싶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학점을 다 채우기까지 이후의 반년 동안, 가끔씩 하굣길이 외로울 때면, 잡생각이 마구 찾아들 때면 달려 봤다.


  여러 이유로 힘든 날이어도, 달리는 것만큼은 힘들지 않아서 좋았다. 개운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타면 땀부터 닦아야 했지만, 땀 정도야 말리면 그만 아닌가. 땀은 눈물처럼 붓게 만들긴커녕 부기도 빠지게 해주는 착한 배출물 아닌가. 이상한 일념으로 집착했던 달리기는 어느새 극복을 돕는 무기가 되어 있었다. 달리기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운동이 아니라 애틋한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나만의 달리기 역사가 쫌 마음에 든다.

 

'달리다'의 용례
1) 달리는 일은 누군가의 염원이었다
2) 달리는 게 빠르면 무엇이 좋습니까?

달리기 위해 건너갔던 큰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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