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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07. 2023

라면 맛있지, 맛있긴 한데....

[ㄹ] 라면
무척이나 간단하지만, 그 간단함에 질려버리기도 하는 소울 푸드


  한국 사람들 중 라면이 불호인 사람 찾기 어렵듯, 나도 맛만 따지자면 호에 가깝다. 하나 라면에 얽힌 시간까지 계산하면 완전한 호가 될 순 없다. 그렇다고 불호라 하기엔 안 사 먹는 것도 아니고, 먹을 때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니 고민 끝에 "라면 맛있지, 라면 필요하지"라 칭찬해 버리고 만다. 하여튼 마성의 음식이다.


  우리 가족은 비교적 맛에 무던한 편이다. 맛난 음식 많이 맛본 언니는 밖이건 안이건 종종 투덜거리지만, 나머지 세 사람(부모님과 나)은 오히려 바깥 음식에 아쉬워하지, 집안 음식은 군말 없이 먹는다. 음식은 내게 허기를 채우는 물질에 불과했다. 학창 시절엔 "너 참 맛없게 먹는다"란 소리도 종종 들을 만큼 '맛있게 먹는다'란 자세 자체가 부재했다. 즐거워하며 먹는 친구들이 오히려 신기했다. 이 음식이 맛있는 건 맞는데, 맛이 있건 없건 배만 채우면 장땡 아닌가, 싶은 의문뿐이었다.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과 '음식 섭취'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건 성인이 돼서야 자각했다. 유튜브에서 도시락 싸주는 영상이 한창 인기를 끌었다. 은근한 힐링이라 보기 시작했더니 나 또한 요리가 하고 싶어졌다. 유튜버들처럼 맛도 좋고 보기도 예쁜 도시락을 싸진 못하더라도 반찬 정도는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하나 우리 집 냉장고며 주방에는 있는 게 없었다. 기본적인 야채랑 육류는 물론 각종 소스며 액체도 없었다. 난도를 낮춰 간단한 요리를 찾아본들 할 수가 없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데 라면만은 서랍에 촘촘히 포개져 있는 게 문득 부아가 났다. 라면 외에 냉동만두도 있었지만 이 또한 새로운 요리가 안 되긴 매한가지였다.




  간단 식품, 배달 음식 먹는 날 외엔 한 끼를 위해서만 장을 봤다. "내일 점심엔 고등어를 구워 먹자" 의견이 나오면 아침에 동네 슈퍼에서 고등어 한 마리만 사 오는 식이었다. 식탁에 주로 올라오는 건 고추와 계란말이, 김, 간혹 찌개, 어쩌다 찾아오는 한정적인 반찬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었고 배가 불렀지만 나도 유튜버들이 하는 것처럼 집에 있는 재료로 색다른 요리를 해 보고 싶어졌다.


  이런 고민을 토로하다 친구들은 주기적으로 마트에 가서 장을 본다 하여 경악했다. 주에 7만 원에서 10만 원이 넘기도 한다는데, 우리 집은 갈 때마다 몇 천 원씩 썼다. 친구네는 대형 마트를 택하니 구경하다 보면 이런저런 것들을 더 담게 된다는 거였다. 우리 가족은 살 걸 정해두니 동네 슈퍼로도 충분했다. 과자가 먹고 싶을 때면 친구네처럼 구비해 둔 과자를 까먹는 게 아니라 슈퍼에 가서 한 봉지 골라오는 식이었다. 자취도 아니고 다 같이 사는 데도 마트를 주기적으로 가지 않는다는 점에 친구들은 신기해했다.


  우리 부모님에겐 이 방식이 편한 거라 밥 얻어먹는 자식으로서 뭐라 할 처지는 안 됐다. 다만 폭발한 지점은 '라면'이었다. 이 카드 쓰면 오늘만 할인된다거나, 편의점에서 행사를 한다거나 할 때 우리 가족이 고르는 건 번번이 라면이었다. "살 게 생각이 안 나네. 라면이나 사자." 이게 반복되는 걸 눈치채자 라면이 그리도 싫어졌다. "어묵 살까?" 하면 "어묵으로 뭐 하게?" 같은 대화 끝에, 바코드가 삐빅 찍히는 최종 승자는 언제나 라면이 됐다. 부모님은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거나 당시로선 할 줄 아는 요리가 없던 나는 말문이 막히니 내려놓을 수밖에.  


  라면은 주기적으로 식탁에 올라오니 사두면 좋은 건 맞았는데 영 탐탁지 않았다. 이후부턴 "대충 라면 끓여 먹자"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기필코 요리에 익숙해지리라 다짐했다. 유튜버들 보며 자극을 받았고, 유튜브 통해 레시피를 익혔다. 도시락 싸는 영상 말고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를 가르쳐 주는 영상이 훨 많았. 부모님을 꼬드겨 대형 마트에서 장을 왕창 보기도 했다. 두고두고 쓸 수 있는 것들 위주로 사고 참치캔, 스팸, 파스타면, 라이스페이퍼 등을 구비니 식탁에 오르는 음식 범위가 확 늘었다. 아빠와 작은 아버지의 농사가 고추에서 감자, 양파, 애호박 등으로 확대된 것도 쏠쏠했다.




  칼질이 손에 익자, 엄마에게 밥을 해 줄 수 있는 게 너무나 기뻤다. 엄마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데도 날마다 밥 해 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가. (내가 더 일찍 뺏지 못한 걸 반성해야 한다) 엄마도 나처럼 '맛있는 음식'에 집착하지 않아 김치, 고추 등 한 가지만으로 끼니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내가 집에 없는 날이면 여전히 그 식단을 고수하는데 이젠 다른 날에 요리하면 되니 균형이 맞아 괜찮다. 여름날이면, 요리하기 싫어하는 엄마가 불 앞에서 더워하는 모습이 그리 신경 쓰였다. 근래는 내가 불 앞에 있는 게 엄마 또한 신경 쓰이는지 무얼 도와주느냐 자꾸 묻지만 혼자 해도 끄덕 없다. 생일상 처음 차릴 때의 기쁨이 일상으로 이어지니 성취감은 쑥쑥 높아진다.


  엄마랑 아빠는 라면 애호가인데도 지금은 라면 소비량이 확 줄은 게 은근 뿌듯하다. 아빠가 타지 근무지에 정착했기에, 알고 보면 거기선 라면을 계속 먹는데 내가 단지 못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물어도 잔소리 듣기 싫다고 고백하지 않을 테니, 그저 다른 레시피들 저장할 수밖에. 돌아오는 주말이면 장을 보러 가고 싶다.


'라면'의 용례
1) 날도 더운데 라면 대신 비빔면이 어떠니?
2) 꼭 라면 먹어야겠으면 양파랑 파라도 넣고 삶거라

아무래도 라면 불호가 맞나 봅니다. 라면 찍은 사진이 어째 한 장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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