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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08. 2023

사기당한 언니 옆에서 양파 썰기

  기승을 부리는 무더위가 만들어낸 열대야에 시달리던 날,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쿠팡 알바를 뛰러 왔다고 했다. 밀폐된 실내에서 에어컨 없이 일하려니 땀이 주르륵 난다는 내용이었다. 잠깐의 숨 돌림 후, "쪄 죽으러 간다"는 인사에 그만해라 말렸건만 3일 연속으로 나가야 인센티브가 지급된다고 했다. 인센티브라도 준다니 안심해야 할지, 간절한 사람들 몸 더 축나게 하는 수법이니 미워해야 할지.


  간만에 언니가 내려왔다. 토일월화수 동안 본가에 머물 예정인데 주말에도 삐그덕거린 관계가 전날(월) 절정을 이뤘다. 관찰자인 나는 수요일이 오기도 전에 언니의 방문(訪問)이 질려버리고 말았다. 엄마가 속상한 지점 알겠고, 언니가 기분 상한 지점도 알겠다. 다 알겠다. 그런데 제삼자인 나만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행위자 둘은 자기 마음만 내세우며 풀려고 하질 않으니 셋 중 관찰자의 속이 가장 들끓을 수밖에!


  언니가 방문(房門)을 쾅 닫고 문까지 잠가버리면 속수무책이 된다. 양심상 이 짓은 10대 때 그쳐야 되지 않나 언짢아지다가도 불과 1년 전의 나도 문 닫고 틀어박힌 경력이 있기에 숙연해졌다. 세상 부모님들의 수모에 감사를....


  거실에 머문 엄마에게라도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의 심정>을 토로했다. 골이 잔뜩 난 언니는 새벽에서야 들어왔다. "왔냐", "어"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각자 잠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도 화는 안 풀릴지언정 새우가 신경 쓰이긴 했나 보다. 이때다 싶어 브리핑을 시작했다. 엄마에게 말하는 내용과 언니에게 말하는 내용이 일치할 수는 없다. 들끓은 내 마음(心)은 하나가 맞으나 엄마와 언니의 관계를 교묘히 붙여주려면 전략을 써야 되기 때문이다. 이 짓을 10년 넘게 반복하면 이처럼 도가 트이게 된다. 서로가 쭈뼛거리며 대화 나눌 장을 만들어 줘야 하는 전국의 새우들, 고생이 참 많다.




  배고프다는 언니에게 알아서 해 먹으라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일어나자마자 잔소리를 했으니 기분 풀릴 걸 내미는 게 옳았다. 하나 계산과 달리 밥 하는 동안에도 대화가 끊이질 않아 언니는 계속해서 말문 막히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양파 뿌리 자르고, 껍질 벗기고, 조각조각 다지면서 언니의 항변에 하나씩 다 반박했다. 탁탁탁 칼질 소리와 목소리의 높낮이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새우가 어딜 고래에게? 나는 새우이긴 한데, 집안에서 가장 어린 새우라 가족들에게 마음껏 잔소리할 권한을 갖고 있다. 서열 꼴찌의 지적에 연장자가 화냈다간 좀스럽다는 소리 듣기 십상 아닌가. 도마 사용이 끝난 후엔 저리 가 있으라 했다. 불 앞에서 짜증 나는 소리 들었다간 내가 폭발할 수 있으니.


  그러다 언니가 급 고백을 하는 게 아닌가. 사기를 당했단다. 그것도 33만 원이나 잃었단다. 언니는 좌절했다. "휴대폰 사려고 그 고생을 한 건데!!!" 쿠팡 뛰며 번 돈으로 결제한 모양이었다. 특정인에게 사기당한 것도 아니고 조직적인 범죄에 연루된 모양이었다. 피해자가 언니 말고 수십 명은 되니 언니 개인에게 33만 원이 고스란히 돌아오는 건 확률이 낮을 터. 언니가 사기당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십 대 때는 길길이 날뛰며 경찰서를 찾아가 형사들까지 질리게 만들었는데 <세상엔 받지 못할 돈>도 있다는 걸 깨우친 모양이었다. 언니의 폭발이 그리 크지 않아서 사실, 좀 놀랐다. 당황하느라 불 앞에 선 것도 잊은 채 위로를 건넸다. 




  언니는 밥 한 그릇 묵묵히 해치우더니 한 그릇 더 먹었다. "그래,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라...." 서열 꼴찌가 연장자에게 잔소리도 모자라 가엾게 여기는 하극상이 우리 집에선 빈번하게 벌어진다. 나는 쌀이 끌리지 않아 무얼 먹을까 고민했는데, 언니가 내려올 때 챙겨 온 빵봉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폐기빵이다 보니 이제는 버려야 된다며 언니가 어제부터 닦달했었다. '버릴 거면 자기가 버리지, 왜 날 시킨담?' 하며 가만히 놔둔 거였다. "에이~ 두부랑 우유도 아니고 빵 정도야" 하는 마음으로 먹었다가 배가 슬슬 아파왔다. 기어이 당하고서야 냉장고에 있는 빵들을 모조리 버리려는데 빵집에서 파는 샐러드도 나왔다. 상한 소스에 물든 채소라면 몰라도 위에 올라가 있는 깨끗한 튀김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빼 뒀다.


  딱딱해져 있는 튀김을 프라이팬에 데우며 양파를 썰었다. 양파 다진 것도 노랗게 볶았다. 튀김 조각에 주목한 이유는, 며칠째 개봉 못 한 <오뚜기 돈가스 소스>를 써 보고 싶어서였다. 양파까지 볶은 건 오래된 음식에 반발할 위장을 달랠 요량이자, 야채도 먹어야 한다는 일말의 양심이자, 내 습관이었다. 요리할 때 양파가 빠지는 법이 없다. 아무튼, 샐러드 안에 든 튀김 조각이 얼마나 되겠는가. 양파 볶음에 튀김 조각이 데코로 올라간 수준이었으나 맛은 좋았다. 양파를 아작아작 씹다가 설거지하려 보니 싱크대 안에 양파 껍질이 수북했다. 고작 한 끼 먹는 데 양파를 세 알이나 썼다. (물론 텃밭 양파라 한 알의 크기가 작긴 하다)




  우리 집은 채소 중에서도 양파 소비량이 높은 편이다. 집 지킴이이면서 홀로 밥도 해 먹어야 하는 내가 양파 러버이기 때문이다. 사실, 언니는 냉동실에 있는 떡갈비를 구워달라고 주장했지만 덮밥을 할 거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떡갈비 덮밥은 어때?"라 말해 웃겼는데, 이 냉동 떡갈비라는 게 원체 기름 줄줄이라 딱히 먹이고 싶지 않아 또다시 거절했다. 잔소리에 따른 기나긴 항변을 양파 써는 동안 들어서 망정이지, 떡갈비 구울 때 시달렸다간 새우도 고래로 변해버릴 수 있었다. 가뜩이나 집안은 덥고, 에어컨 켠들 시원한 공기가 주방까지 미치진 않으니 까딱하다간 나도 예민해질 뻔했다.


  33만 원 사기당한 언니는 밥 잘 먹고, 잘 쉬다가, 낮잠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좀 놀랐다. '언니가 화를 다스리고 말했구나.... 사기당했는데 언니 성격에 잠이 올 수가 있구나....' 어제오늘 언니의 행동엔 태클 걸 곳이 참 많았지만 그럼에도 "으이구"에 그친 이유는 언니가 내게 화를 안 내서다. 만약 언니가 집에 먹을 것도 없고, 돈도 잃었고, 엄마도 뭐라 하는데, 네까지 뭐라 한다며 화냈다면... 이하 생략 


  동그란 양파를 반으로 썰고 반구 모양을 세로로 파박, 가로로 파박 칼질하다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생긴 것도 깨끗한데 볶으면 달달해지기까지 하니, 양파 썰기도 일상의 수확이라면 수확일 터. 껍질 벗기고 썰다보면 눈물이 고여 난리쳐야 하는 것도 재밌다. 내가 양파 써는 걸로 소소한 힐링을 누리듯, 언니에게는 낮잠이 이러한 역할을 할 테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밥 먹고 바로 자지 말랬지! 일어나서 배 아프다고 하려고!"란 잔소리는 참았다. 이렇게 서로 참아야 가정이 굴러갈 수 있다.


  뻘글의 요지

  1. 화부터 다스리고 할 말을 시작하세요!

  2. 양파 썰기는 분노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시큼함보다 달달함이 강해 볶은 양파와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네요.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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