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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08. 2023

실패한 농담이라 여길란다

[ㅁ] 만우절
누군가를 속이는 날로, 모든 장난이 그러하듯 상처를 줄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설명을 뚝 자른 게 아니라 전편과 이어지는 글이라 그렇습니다!]


  할아버지의 '그 부탁' (사실은 농담)만으로 열이 뻗쳤던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부탁만 하셨지, 엄마는 성별을 안 날 의사 선생님 앞에서 오열하였다고 했다. 마취에서 깨고 나서도 속상함이 안 풀려 아기를 보러 가지 않았다는 일화가 날 완전 벙찌게 만들었다. 이는 엄마의 과거만이 아니라 나의 과거이기도 했다. 뱃속에 있을 때와 세상에 나왔을 때의 일이니 어찌 보면 나의 맨 첫 번째 과거이기도 한 셈이었다.


  분통해하는 내게 한 친구가 "드라마에서 주인공 서사의 시작"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과거가 주인공은 무슨, 나 지금 진지하다며 넘겼는데 이 말은 미움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함께 생각났다. 그러다 해당 일화를 굳이 부정적으로 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거 중에서도 과거] 할아버지께선 말은 안 되지만 가능은 한 부탁을 하셨다.

  [이후의 과거] 할아버지가 손녀인 날 미워하신 순간도, 딸을 낳은 며느리를 안 좋게 보신 적도 없었다.


  [과거 중에서도 과거] 아들을 바라던 엄마는 태아의 성별이 딸이란 사실에 크게 실망하였다.

  [이후의 과거] 내가 엄마 껌딱지였듯, 엄마는 내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현재] 엄마는 지금도 날 사랑하신다.


  중요도로 따지자면 과거보다 더 과거 → 과거 → 현재 순이 아닌가? 머나먼 과거의 일로, 부모님과 돌아가신 조부모님께 투정 부리는 게 맞는 건가주춤 주춤하게 됐다. 친구는 내 일화를 '드라마'라 비유했다. 흔치 않은 얘기라는 뜻이었다. 이 과거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생일>이며 <생일이 그리 된 이유>가 명확하다는 점은 남들과 다르긴 했다. 내가 태어난 날 부모님 비롯해 친조부모님과 외할머니("노인네 부탁이니 들어주라"며 일침)한테도 인상 깊었으리라.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내가 딸이라는 이유로 구박했다면, 이러한 비화는 원망의 근거가 되어도 마땅하다. 하지만 전제는 반대였다.




  아이 출산과 동물 입양은 동일 선상이 아니라고 보는 분들도 있겠지만, 내가 부모가 안 되어 봤으니 이 비유밖에 없다. 그러니 양해 바란다. [ㄱ] 편에서 다루었듯, 내게는 세상 오만가지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아쉬울 멍멍이가 있다. 그 멍멍이가 오기 전까지 나는 입양을 내켜하지 않아 했고, 생명체를 어떻게 돌보리란 생각에 마음도 불편했다. 멍멍이가 우리 집에 당도한 이후, 어색하게 구느라 마냥 잘해 주지 못했다. 그 몇 주가 내게는 되돌리고 싶은 유일한 순간일 만큼 지금도 미안하다.


  부모님과 조부모님도 이런 마음이셨을 테다. (만우절이 소원을 이루어 주는 날은 아니니, 애당초 농담으로 킬킬거리신 거겠지만) 성별 때문에 속상한 건 몇 주에 불과했으니, 20년에 가까운 기간(조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20년이 넘는 세월(부모님과의 현재 진행) 충분한 사랑을 주실 수 있었다. 받은 사랑의 무게를 보아야 했다. 엄마가 내게 고백한 일화는 두 편에 걸쳐 서술 가능한 분량이지만, 그간 받은 정을 논하면 글 100편도 모자라리라. 여기까지 계산이 미치자 내 미움이 얼마나 유치했던지를 깨달았다. 어찌 됐든, 당사자가 이 농담을 싫어하니 어른들이 봐줄 수밖에. ㅎ


'만우절'의 용례
1) 아무리 만우절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거짓말이 있지
2) 대학에서는 만우절을 못 즐기는 게 아쉽네


외할머니,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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