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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0. 2023

사과와 자존감은 반비례하나요?

[ㅅ] 사과
응당 해야 하는 순간에도 발화로 이어지기가 어려움
상황 모면을 위해 굳이 할 때도 있음, 즉 진심 여부를 파악하기가 힘듦

  사과 횟수와 자존감은 반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사과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낮은 자존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예 틀린 말 아니지만 보다 정확한 식을 위해서는 태도가 덧붙여져야 한다. 놀라면서 사과하느냐, 덤덤하게 사과를 건네느냐, 사과하면서 쩔쩔매느냐.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놀라면서 사과하는 경우: 버스에서 타인의 발을 밟는 등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2) 덤덤하게 사과하는 경우: 잘못을 인지하면서 스스로 놀라지는 않을 때, 혹은 마음을 진정시켰을 때

  3) 쩔쩔매면서 사과하는 경우: 상황을 얼른 모면하고 싶을 때, 혹은 자존감이 지나치게 낮을 때


  세 태도에선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등 '죄송'과 '미안'이 또박또박 발음된다. 간혹 사과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말하는 사람들의 경우 "(ㅈ)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제 됐어요?" "그래, 잘못했다! 내가 죄인이다, 죄인" 이런 식으로 개미 똥구멍처럼 작게 말하거나 성질을 팍팍 낸다. 이런 이상한 유형은 굳이 다루진 않겠다.


  사과의 중요성과, 어느 순간에 적절한 사과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1~2의 경우를 반복한다. 3의 경우는 올바른 사과는 아니다. 상황 모면이야 스스로의 양심에 달린 거지만 쩔쩔매는 사과는 고칠 필요가 있다. 이도리어 상대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며 이러한 사과가 반복되면 자기 비하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10대 시절에는 쩔쩔매면서 사과할 때가 많았다. 당시엔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어릴 때부터 자존감이 지나치게 낮아서였다.


  초등학교 입학하며 국어, 영어, 사회, 역사, 도덕좋아했다. 수학, 과학 같은 과목들은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어서 정을 못 줬다. 구구단 못 외운다고 얼마나 구박을 받았던가. 계산 실수할 게 뻔해 실험실 들어가기도 얼마나 싫었던가. 그러다 중학생이 되며 영어리스트에서 제명됐다. 단어 외울 줄만 알지, 문법의 장벽을 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국어, 사회, 역사, 도덕만 품에 낀 채 고등학교에 진학할 줄 알았는데 중3 때 변수가 생겼다.


  한참 전에 버려졌던 과학이란 놈이 리스트에 올려달라며 알짱거리는 게 아닌가.


  중3 때 과학 선생님은 목소리가 차분하셔서 졸려하는 애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나 같은 과학 초보자에겐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와 느리고도 반복되는 설명이 딱 맞았다. 살다 살다 과목 중 과학을 제일 잘하는 순간이 오니 나나 가족들 모두 신기해했다. (고등학교 진학하자 원래의 점수를 되찾긴 했지만.... ^^)




  졸업식이 찾아오기 며칠 전, 선생님에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선생님은 "이게 뭐야? 정말 고마워, 잘 읽을게"라며 편지를 꼭 쥐시곤 내가 봐왔던 모습 중 가장 따스한 웃음을 보이셨다. 선생님의 그 표정은 내게 민망한 죄책감으로 남아 도저히 잊질 못하겠다. 편지의 내용이 아주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만나 내 문과(文科) 두뇌도 '과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됐지만, 과학과 거리 둔 시간이 길었던 탓에 한계도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이건 왜 그렇게 되나요? 이게 뭔 말이에요? 같은 질문을 참 많이 던진 끝에야 수업 내용이 입력되었다. 그렇다 보니 당시엔 선생님에게 감사하기보단 죄송했다.

 

  중학생의 구사 범위로 써서 단어 차이는 있겠지만 대충,

  "선생님이 제게 그토록 신경을 써주셨는데 끝내 만점을 맞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시간을 허투루 만든 거 같아 정말 죄송합니다"

  이 내용의 편지를 썼다.

  사과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상대가 사과를 바란 것도 아닌데, 16살의 나는 분간할 줄 몰랐다. 기대를 품고 뜯으셨다가 당황하셨을 선생님지금도 죄송할 따름이다.


  한 문제 틀렸다고 죄송하다 말할 게 아니라, 내게 '과학의 재미'가 무엇인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주신 선생님과 선생님의 수업 방식에 감사해야 했다. 과학 선생님께 드린 편지가 유독 심해 선생님을 예시로 든 거지, 선생님은 물론 가족들, 친구들에게도 사과의 말을 참 많이 내뱉었다.


  내가 뭐라고,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나는 형편없는 사람인데.... 이런 세뇌에선 스무 살 정도에서야 완전히 벗어났다. 그전까진 친구들을 만날 때면 '나 같은 애랑 놀아줘서 고마워'생각할 만큼 낮은 자존감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나친 스트레스와 가정 내 문제들로 박살 난 자존감 결국 '사람'을 통해 회복될 수 있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면모와 소설 속 상황들을 눈여겨보고, 직접 소설을 써보기도 하며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익혔다.




  '사회성 부족'이란 말도 10대 시절 수식어였다. 이는 중3 담임 선생님께 들은 말이었다. 선생님은 교우 관계에 힘들어하던 내 양팔을 꽉 붙잡으시곤 단호한 얼굴로 "넌 사회성이 참 부족하구나"라 말하셨다. 그 말보다도 전해지던 통증이 더 오래 남을 만큼 선생님을 두려워했다. 선생님은 나와 둘이 있을 때면 양팔을 꽉 붙잡으시기 일쑤였다. "새 학기 땐 착했던 거 같은데, 선생님이 보기엔 넌 착한 게 아니라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걸린 거다" 같은 말도 하셨다.


  23살의 난 선생님을 미워하진 않는다. 선생님이 16살의 나를 안 좋게 보셨어 그 말들에 매몰되지 않았으니까. 사회성 부족한 건 진작에 알았. 어른들은 만 하곤 도움 줄 생각은 안 한 게 지금도 의아하다. 무튼  방법을 찾으며 나아지려 노력 끝에 선생님의 면모 또한 받아들이게 됐다. 아무리 미워해 봤자 한때 보고 연락 끊긴 사람에겐 없다. 미운 감정이 지속될 경우, 아파하는 사람 또한 자기 자신뿐이다.  


  주변에 쩔쩔매며 사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고집부리는 성격이 아니라면, 두 행동을 취해 보길 부탁드려 본다.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란 말 상는 자신의 사과를 되돌아볼 수 있다. 동시에 사과와 감사를 적절히 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고민에 빠졌던 상대 새로이 배울 수 있다.


  우리 자라나는 10대분들, 본인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 거 같다면 다른 책 말고 소설책, 일반 소설 말고 성장 소설을 자주 접하길  본다. 이는 상처 준 이들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동시에 못된 이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복수이도 하다.


'사과'의 용례
1) 사과는 저 사람이 해야 되는 거야
2) 사과 말고 감사가 때로는 상대를 더 기쁘게 만든단다

16살에도 장난감 코너를 좋아할 만큼 유아틱한 면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키덜트'란 포장이 있으니, 직장인이 되면 장난감 코너를 주기적으로 방문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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