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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5. 2023

우리 할머니, 나의 할머니, 내 (...)

[ㅎ] 할머니
손주가 철들기 전에 떠나버리시는 애틋한 존재


  꼬불꼬불 시골길에 진입하고 언덕까지 올라야만 뵐 수 있는 친할머니와 달리 외할머니(* 이하 '할머니'라 표현)는 방방곡곡을 공유한 친근한 사이였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2010년이나 2011년이었을 테다. 엄마가 아프던 내 생일날,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와 계셨다. 큰 방에서 이불 덮고 있는 엄마 대신 할머니와 케이크를 먹으며 '할머니가 있어서 참 좋다'는 마음을 품었다. 할머니는 내게 예쁘다는 말을 해 주지도, 세상을 다 얻은 미소를 보여주지도 않으셨다. 다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성격은 못 되셨다. 할머니와 손을 꼭 붙잡고, 할머니 품에 들어가 잠들 때면 '옆에 있는 사람은 우리 할머니야, 내 할머니야'란 안도를 느낄 뿐이었다.


  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매일 할머니와 마실 나갈 만큼, 할머니는 외출을 좋아하셨다. 할머니댁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리곤 할머니의 방앗간인 과일 가게를 기웃거리거나, 할머니가 열쇠 들고 나타나길 기다릴 때도 있었다. 혼자 사셨지만 친구들이 참 많은 분이셨다. 할머니의 그런 점이 좋았다. '우리 할머니, 참 동안이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까만 머리칼과 꼿꼿한 허리, 튼튼한 두 다리와 젊은 목소리도 자랑스러웠다. '할머니는 언제고 내 곁에 있을 거야'란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 견고해져 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고3 때 쓰러지셨다.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마스크란 걸 처음 구매하곤 대학병원을 어슬렁거렸다. 할머니가 어디 누워 계시는지, 몇 층으로 가야 할머니를 뵐 수 있는지 알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가 왜 여기 계시는 거야'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할머니 뵙고 오라 했으니 방명록을 쓰고 안내를 받으며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긴 했다. 거대한 공간에 온갖 침대가 즐비해 있는 게 시야를 사로잡았다. 침대는 이리 많은데 서 있는 사람은 적은 것도 이상했다. 할머니는 좁은 침대에 누워 계셨고, 눈을 뜨고 있지도 않으셨다. 그런 할머니의 얼굴을 오랫동안, 빤히 쳐다보며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할머니가 실눈을 뜨시자 "할머니 나예요, 칠칠이. 나 갈게요" 그 말만 하고 나왔던 거 같다.




  내가 거부한다고 해서 할머니의 병환이 낫는 것도 아닌데 그리 못나게 굴었다. 할머니가 쓰러지시기 전 우리 집에 머무실 동안에도 예민하게 군 주제에, 사태가 이리 흐를 거라 예상 못한 나 자신이 한심했다. 아기도 아니고, 강아지도 아닌, '강인한 할머니'를 돌보는 일이 싫었다. 바쁜 와중에 할머니 몫의 밥까지 해 놓고 가느라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하는데, 맛없다며 건강식을 거부하는 할머니도, 할머니가 먹어야 할 약이 한 움큼 있는 것도, 혈압 재는 기계를 익혀야 하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같이 지내기하셨으면서 가만히 앉아만 계시거나, 누워만 계시는 게 속상을 넘어 슬슬 짜증 났다. 제발 좀 걸으시라 다그쳐도 힘들다며 안 나가시고, 말 한마디 안 거실 거면서 내 움직임만 기웃거리시는 '달라진 할머니'가 낯설었다. 손주까지 힘들게 하지 말라는 이모들의 다그침에 할머니는 원래의 할머니댁으로 가셨다. 엄마가 할머니를 뵈러 간 날에 쓰러지셨기에 큰 일은 막았지만 모든 일과 모든 눈물이 내 잘못 같아서 감히 '할머니'를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투석이 가능한 입원 자리를 찾느라 어른들이 고생하셨다. 우리 낡은 동네에 유일한 자랑은 저 큰 H 병원뿐인데 저 병원 말고 다른 병원을 찾아야 되는 것도 의아스러웠다. 이날부로 H 병원을 싫어하게 됐다. 대학병원에 할머니 뵈러 간 날이 19년도 12월인가 20년도 1월이었다. 얼마 안 있어 코로나가 터지며 달에 한 번, 어쩔 때는 격월로, 그조차 유리문을 사이에 둔 채 10분의 통화로만 목소리를 듣는 나날이 1년 넘게 이어졌다.


  할머니가 쓰러지시기 전까지 한 번도 할머니의 흰머리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누구보다 동안인 줄 알았는데 뵈러 갈 때마다 점점 새하얗게 뒤덮이는 할머니의 머리를 보며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어쩔 때는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렇게 못 되게 굴었으니, 받아들여야지 뭐', 언니만 기억하시는 할머니에게 서운한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서운함은 잘못 없는 사람만 느끼는 거니까.


  호전됐다, 병원에서 급히 연락 왔다, 어디가 또 문제시란다, 상황을 전하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할머니잖아, 뭐가 문제야' 그리 생각했다. 할머니가 얼마나 험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그리 멍청하게 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들은 밤, 내 오만한 기대 또한 무너져내렸다. 할머니가 쓰러지신 후로, 할머니로 인해 운 건 처음이었다. 보호자는 한 명밖에 못 있는다 하여 병원에 가지도 못했다. 울면서 잠들었다가 깼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와중에도 잠든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어느새 눈물도 뚝 멎어 있었다. 차에 올라타고 잠자코 이동하던 중 '장례식장'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다시금 눈물이 터졌다. 그 후론 울다 그치길 반복했다. 염습 때와 할머니가 묻히실 때는 걷잡지 못했다. 할머니와 같이 오던 할아버지 산소에 또 다른 관이 들어간다는 게, 저 좁은 관에 할머니가 계신다는 게 말이 안 됐다.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인 엄마가 무너지는 것도 내 오랜 두려움이었으나 우려와 달리 엄마는 씩씩하게 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울음을 멎지 못하고, 울다가 잠도 들지 못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가서도 눈물을 터뜨린 건 쌀쌀맞던 막내 손녀인 나였다. 나와 할머니 사이에서 맘고생한 엄마 보기도 죄송할 만큼 누구보다 슬픔을 멈추지 못했다. 사실 우리 모녀는 할머니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할머니가 여전히 곁에 있다고 말하며, 나 또한 그게 당연하다고 본다. 할머니는 우리 대화에 자주 등장한다. 이리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말도 안 돼. 어느 누가 우리 할머니를 데려가. 우리 할머닌데, 나의 할머닌데.


  몸 성장 말고 마음의 성장은 정해진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어차피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빨리 성장을 이루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미성숙 자체였다. 할머니가 편찮으시기 전, 마음의 성장은 유아 단계였다는 게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과거다.


  상실의 방법에 대해선 논하지 못하겠다.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게 상실이라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상실 뒤에도 무언가가 남아 있다고, 영원한 작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 하고도 몇 달 지난 지금도 내가 여전히 할머니를 사랑하고 있듯, 할머니의 사랑도 진행 중일 테다.


'할머니'의 용례
1)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어찌 해야 돼
2) 할머니는 이런 아픔을 어떻게 견뎠어?

2017년, 할머니와 다정히 보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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