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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4. 2023

입 바른 소리를 반복하는 이유

[ㅍ] 포도
입맛 다시게 하는 생김새나,
껍질과 씨를 뱉어야 되기에 먹기 편한 과일은 아님


  초중고 이어 대학가서도 '성실하다'란 평가를 꾸준히 들었다. 성실하지 못한 것보다 성실한 게 좋긴 하다만 다른 수식어가 갖고 싶었다. 이를 테면 재능. 재능이 뛰어난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데엔 시간이 걸렸다. '성실'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대신 '욕심 없다'는 말 스스로 내세우고 있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엔 '포도나무'를 볼 수 있었다. 인근 단독주택에서 마당과 옥상의 일정 부분을 포도 재배에 할애해 포도송이들이 잘 보였다. 이 시기에 읽은 <어린이를 위한 탈무드 만화> 책에선 포도를 탐내는 여우 이야기도 있었다. 책 속 포도 그림과 등하굣길 포도나무가 머릿속에 겹쳐지면서 '포도, 참 맛있겠다'란 생각'만' 자주 하였다. 외할머니댁에 가면 포도가 매번 있었는데 여우처럼 와구와구 먹은 적은 없었다. 한 알 먹고 껍질과 씨앗을 퉤퉤 뱉는 귀찮음을 견딜 만큼 포도 알맹이가 어린 내 입맛에 그리 달 않았다. 씨를 삼킬 수 있는 수박이나 어른들이 껍질을 깎아주는 배가 더 달달하고 좋았다.


  이랬던 과거가 무색하게 '소유욕' 때문에 꽤나 고생했다. 용돈을 받게 되자 갖고 싶은 물건을 살 수 있을 줄 알고 기뻐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있으니 파는 행위 또한 가능했다. 고작 14살 중삐리도 거래를 할 수 있다니, '지갑이 얇아지는 게 아니라 마르지 않는 샘처럼 유지되겠구나!' 싶었다. 중X나라와 번X장터에 상주할 만큼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현혹됐다가 회의감이 찾아들며 모조리 청산했다. 17살에 단체 공구도 여는 등 사는 일 말고 파는 일에 집중하니 일상을 너무나 빼앗기고 말았다. 갖고 싶어서 샀다는 말이 무색하게 물건이 내 손에 머무는 시간은 무척 짧다. '물건을 물건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돈으로만 보고 있구나'란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하며 중고 어플을 다 지웠다.


  날이 갈수록 소유욕 닳있다. 인터넷 세상에선 오만 물건이 넘쳐나니 까딱했다간 눈 돌아가는 날도 있지만 결제까진 가지 않는다. 포도송이가 입맛을 다시게 해도 막상 맛보면 실망이 맛있겠다는 상상만 하고 말 수 있었다. 아름다운 물건 에 쥔들 기쁨은 한순간일 뿐이다. 아름답다는 감상에만 그야 실망이 반복되지 않는. '욕심 없다'는 수식어는 '성실'처럼 내 인생을 함께한 게 아니라, 곁에 두고 싶은 수식어인 셈이다.




  욕심이 없었다가, 욕심 때문에 온갖 고생을 했다가, 다시 욕심을 없애려는 내 과정은 선(善)이란 행위와도 같다. 개인적으론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중 '성선설'파.


  맹자성선설, 사람이 날 때부터 착하다는 데 포커스가 맞추어진 게 아니다. 가 욕심을 없앤 것처럼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


  우산(* 牛山, '제나라'라는 대국에 있던 산)의 나무들이 아름다웠다 한들, 사람들이 땔감으로 쓰 조리 베어 낸다면 아름다움은 유지될 수 없다. 새로운 싹이 자라려 한들, 소와 양을 풀어두면 민둥해져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민둥해진 산을 보고 일찍부터 저랬다고 여기는데, 이것이 산의 본성이겠느냔 비유를 고 있다.


  우산의 나무는 사람이 지닌 인의이자 양심이고, 사람들이 나무를 베는 행위는 이를 놓아버리는 실수 내지는 잘못들다. 양심이란 건 싹 매일 자라만, 싹을 동물의 먹이로 쓰는  어그러트리는 일이 반복되면 선은 보존될 수 없다. 민둥산이 되고 나서 원래부터 저랬다고 착각할 게 아니라 민둥산이 되기 전에 눈치채고 조심야 한다.




  '착하다'는 건 만인이 떨쳐낼 수 없는 수식어다. 지금 착하지 않은 것이지, 태생이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은 한참 전에 민둥산이 되고도 았다. 그런데 범죄를 안 저지른 우리를 저들과 동격 선상에 두어선 되겠는가. "세상에 이상한 사람 참 많다"는 말을 내세우며 "나라고 착할 필요 없다, 착한 이는 손해 보기 마련이다"라는 사고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아직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며 "싹수부터 노랗다"는 말을 던진다. 아이의 행동에 관대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행위를 끊임없이 합리화하니 모두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욕심 많아서 아름다운 물건을 쟁취할 때보다 욕심 없어서 하루에 0원 쓸 때 잦은 지금이 더 행복하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말을 들은 시기 친하지도 않은 한 친구에게서 "싸가지 없다"는 말도 들었다. 1년 후 엄마에게서 동일한 말을 들었다. 상처를 받았지만 세 경우 다 내 행동은 합당했다. "그래, 나 싸가지 없다"며 보란 듯이 나가지 않았다. 그때건 지금이건 동일한 심성으로 여전하게 행동하, '착하다'란 말 끊임없이 듣는다. 나만 착한가? 그 말을 한 당신도 착하다. 이 글을 읽어주는 여러분도 착하다.


  잘못된 이들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착함을 '잃은' 사람이다. 손해 보기 싫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온 국민이 민둥산처럼 되어버리는 것만큼 끔찍한 결과는 없다. 마음이 민둥해진 사람은 스스로 방치결과니 그들의 행위 욕하면 된다. 민둥산이 되어버린 자들에게 내 자신을 맞추지 말자. 이상한 사람은 '이상해진' 사람이고, 다수가 이상해지지 않다면 사회이상한 사회가 안 된다. 사회는 초목이 자라는 것처럼 발전할 수 있다. 그 사회에 속한 우리가 달라기만 한다면.


  어째 '포도' 얘기는 한 단락에 그치고 말았다. 이 글만큼은 단어 선정이 틀렸다 해도  주시길. ㅎㅎ 합니다.


'포도'의 용례
1) 씨 없는 포도가 개발돼서 편해졌다
2) 포도가 달린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네

아이들의 소꼽놀이 흔적. 아이들의 순수함을 의심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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