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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8. 2023

정수기가 내게 건네는 경종

새벽 3시에 듣고 새벽 4시에 쓴 글

[ㅉ] 쫄쫄
물 흘러가는 소리라 하기엔 묘하게 아쉬운 낱말


  고등학생이 되고 일정량의 용돈을 받으면서는 '돈'을 기부하였다. 하나 용돈 받기 이전에 "무얼 기부하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눈동자 돌릴 필요도 없이 "물이요!"라고 대답했을 테다. 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마'라 부른다. 자칭타칭 학창 시절을 하마로 보낸 사람들은 물을 기부했다는 표현에 공감의 끄덕임을 반복하지 않을까 싶다. 애정하는 친구들아, 직접 싸 오면 되지, 왜 맨날 남의 물 뺏어먹었니!


  초등학생과 중학생 때는 끓인 물을 싸 갖고 다녔다. 가스레인지 불 말고도 우리 엄마의 열불 또한 깃든 물이었다. 당시 우리 집엔 정수기가 없었고 생수를 사 마시길 바라는 엄마에게 "생수 비려! 맛없어!"외치는 철부지 딸이었다. 그 덕에 눈에 좋다는 결명자차를 몇 년 동안 마실 수 있었다. 효과가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진 모르겠다. 그간 시력이 저하되진 않았고 이후 안경을 벗고 다녀도 일상생활은 가능한 지경이 됐다. 이게 순전히 결명자차만의 공은 아니다. 내 콧대가 안경의 무게를 받쳐줄 힘이 없다고 투덜거려 벗어던진 것도 있어서다. 아무튼, 결명자차는 맛있다. 맛만큼은 보장한다.


  그랬던 만큼 엄마가 정수기 설치를 선언했을 때 나는 극구 반대했다. 생수 못 마시는 하마의 갈증은 어떡하고! 엄마는 "정수기 물도 마시다 보면 익숙해질 거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고 우리 집 싱크대 왼편에는 흰색 정수기가 자리하게 됐다. 정수기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모르겠다. 하마에게 물맛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맛없는 물도 갈증 충족시킬 순 있고, 엄마의 말마따나 뭐든 겪다 보면 정들기 마련이니 몇 년 지난 지금은 생수 러버가 됐다. 끓인 물만 마실 때는 식당 갈 때마다 "윽, 비려" 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근래는 식당이든 카페든 물 세 컵은 주르륵 들이킬 만큼 발전했다.




  정수기의 네온 불빛도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다. 새벽에 활동하는 부엉이파에게 어둠을 방해하는 형광 불빛은 은은하게 거슬렸다. 정수로 설정되어 있을 땐 초록 물방울이, 냉수로 설정되어 있을 땐 파란 물방울이 발광하는데 물방울 모양 정도야 귀여우니 약과다. 다만 안에도 뭐가 있는 건지 틈 사이로 퍼져 나오는 불빛은 꽤나 거슬린다. 이보다 열 배 더 거슬리는 건 '자동 살균' 소리일 테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걸 알면서도 미리 물을 안 받아놓을 때가 부지기수다. 쫄쫄 물 흐르는 소리 들으면 소변 마려운 것처럼, 하마인 내겐 정수기가 살균하는 동안 울리는 소리가 그 어떤 것보다도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정수기 소리가 도움이 될 때도 있긴 하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새벽 기준, 나흘간 일 잡힌 사람으로선 오늘 새벽이 한 주의 할 일을 끝낼 수 있는 기회다. 표면상으론 대학생, 실질적으론 백수인 사람이다 보니 할 일이라고 해 봤자... 나와의 약속이다. 다만 슬기로운 백수 생활 제1원칙이 '게으름 피우지 말자'인 만큼 나와의 약속이 꽤나 구체적이고 많다. 새벽에 그 약속에 몰두하다가 집중도 안 되고 머리도 지끈거려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인간아, 백수야, 왜 자빠져 누워 있니"란 타박에도 내 몸은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이왕 누울 거면 푹신한 소파에나 눕든가,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백수의 불안'에 침잠되어 가고 있을 때, 기막히게 정수기가 살균을 시작했다.


  "시작됐다" 오늘만큼은 갈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단 "저 소리가 끝나면 그땐 일어나는 거야, 그전까진 생각을 멈춰 봐" 체면을  그토록 거슬렸던 정수기 소리가 asmr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쫄쫄(* 호스 통해 물이 배출)을 끝으로 집안의 소음은 다시 無 상태가 되었다. 정수기 소리가 끝났으니 백수가 소리를 내자 싶어 몸을 일으켜 다시 할 일을 시작했다. 좀 지나니까 두통가시는 느낌이었다. 부엉이파인 탓에 앞으로도 새벽 내 울리는 살균 소리를 들을 일 잦은데, 이제는 내가 그 소리를 기다리지 않을까 싶다.




  가만히 누워 있는 일이 내게는 버겁다. 누워서 아무 생각 안 하는 일은 거의 <수능 수학 30번> 수준이다. (* 단 한 번도 풀어본 적 없음) 한창 바쁠 때도 이랬는데 바쁘지 않은 백수가 되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뭐가 그리 바빠!"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백수라서 바빠"를 외치며 시간을 쪼개고 쪼갠 지 어느새 한 달하고도 일주일이 되었다. 브런치 시작한 지는 한 달이 되었다. 백수 일상 중 브런치 안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브런치라도 있어서 첫 한 달을 '한심하게' 보낸 거 같진 않아 안도한다. 그래놓고 입으로는 손톱을 뜯으려 하지만.... 타자를 쳐야 되기 때문에 이 또한 자중하고 있다. 잠깐 타자를 멈추는 순간 손톱 자연히 입으로 향하겠지.


  [ㅉ] 편의 주제는 없다.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었다면 애당초 '쫄쫄'이란 단어를 선정하지도 않았을 테다. 백수로서의 불안을 어딘가에 읊고 싶은데 마땅한 데가 없어서 <모국어 사전> 매거진에 끼워 넣어봤다. 궁색을 갖추자면 '한 달 기념 쉬어가는 글' 정도로 볼 수 있을까? 백수는 오늘도, 지금도 한숨을 내쉰다. 1시간 전에 울려 퍼진 정수기 청소 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 진다. 한 번 더 누워 있게. ㅎㅎ


  ※ 구독자분들, 작가님들, 이외에도 들려주신 숱한 분들! 한 달 동안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


'쫄쫄'의 용례
1) 시냇물 소리는 졸졸일까, 쫄쫄일까?
2) 쫄쫄 소리 들으니까 화장실 가고 싶어 지네

정수기야, 고맙긴 한데 넌 너무 눈부셔서 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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