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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19. 2023

아무리 써도 닳지 않아요

모국어 사전 1탄 '자음'을 마치며

  [ㅆ] 편의 후보 중엔 '쓰다'란 동사가 있다.


  '쓰다'는 보통 두 갈래로 나뉘는 듯하다. 엄마의 로션을 쓰다, 아빠의 돈을 쓰다, 언니의 베개를 쓰다. 세 문장에서 동사 '사용하다'로 바꿔도 말이 된다. '빌려 쓰다', '가져다 쓰다', '빼앗아 쓰다' 등 '쓰다' 앞에 또 다른 동사를 붙일 수도 있다. 하나 한 문장만으로는 앞뒤 정황을 알지 못하니 '사용하다'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쓰다' 앞에는 목적어가 오기 마련인데 그 목적어가 '글'이라면 상황 달라진다. 일기, 편지, 수필 기타 등등. 글자로 이루어진 낱말과 낱말로 이루어진 문장의 조합인 '글'과 '쓰다'란 말 합쳐질 때는 '사용하다'로 바꿀 수 없게 된다. 대신 '적다'가 '쓰다'란 자리에 올 수는 있는데 왠지 모르게 만족스럽지 않다. '글쓰기'라는 익숙한 말이 있기 때문일까. '글적기'라는 단어가 없는 걸 보면 '글'은 아무래도 '쓰다'와 가장 궁합이 좋아 보인다.




  엄마의 로션을 빌려 쓰면 로션의 양은 닳는다. 아빠의 돈을 가져다 쓰면 아빠 재산은 줄어든다. 언니의 베개를 빼앗아 쓴들 베개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내가 쓸 동안 언니는 쓸 수 없다. 이처럼 '사용하다'로 대신할 수 있는 '쓰다'의 경우 어떠한 마이너스 내지는 손해가 발생한다. 엄마의 로션은 닳고, 아빠의 재산도 닳으며, 언니의 베개도 닳아 버린다.


  글은 다르다.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거나, 엽서에 편지를 쓰거나, 블로그 수필을 쓰는 등 '글'이 지기 위해서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공간은 필요할지 몰라도  번째 상황과 달리 목적어인 글 닳 않는다.


  글은 '쓰다'는 행위로 인해 점점 불어난다. 일기 쓴 게 쌓이고, 편지며 수필을 자주 다면 체는 어느새 이전과 달라져 있게 된다. 불평불만의 글쓰기도 지속하면 효과는 크다. 기분을 풀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글은 쓰다 보면 늘기 마련이다. 알맹이가 부정적이라 한들 여러 낱말을 굴려가며 쓰다 보면 문장 나아지게 된다. 이처럼 '글쓰기'에는 내재된 힘이 다. 그래서 나는 보통의 '쓰다' 말고, '적다'로 대신할 수 있는 '쓰다'가 좋다. '글'과 '쓰다'가 만나는 경우가  좋다.




  내게는 글쓰기가 일종의 '말장난'처럼 여겨진다. 글쓰기를 통해 모국어를 정제된 형태로 옮길 수 있는 게 재밌다. 일상에서도 말이 많으면서 글쓰기까지 멈추지 않는 건 순전히 모국어를 애정해서다. 언어를 입로 발화하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아직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의 말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걸 우선으로 둔다.


  한국어가 서툰 이가 하루담아글이 있고, 한국어가 모국어인 이가 특 개념을 설명한 글이 있다고 할 때 다수는 후자의 글이  이해하기 쉬웠다고 말할 테다. 전자의 주제가 가볍다 해도 글쓰기에는 해당 <언어에 몸담은 세월>이 농축되어 있어서다. '소통'을 넘어 '이해'에 도달하는 것, '이해'에 도달한 후 타인의 사고 '확장'까지 야기시키는 건 <언어에 익숙해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내 전공은 우리나라 말고 특정 국가의 어문학이다. '어'보다 '문'을 따라간 거라 외국어를 배때 막막하기만 했는데 내 입을 통해 낯선 언어가 흘러나오는 시간은 꽤나 신선했다. 교양 수업에또 다른 언어를 배워보기도 했다.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 목구멍의 쓰임새가 확 바뀌 게 달랐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전공인 외국어 공부에 매진하지 않으며 마냥 즐거웠던 또 다른 언어도 가래 끓는 소리만 기억한 채 잊어버렸다. 안 아쉽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아쉬움 툴툴 털어 있다. 외국어의 낯섦에 반해 외국어에 빠져든다 한들 외국어 공부가 모국어 애정을 넘어설  없다는 확신에서다.




  아무 문장이나 내뱉어 보겠다.

  <아빠가 사 온 아이스크림이 며칠째 냉동실에 있다>

  이 문장을 달리 표현해 보겠다.

  <냉동실을 열면 아빠가 사 온 아이스크림이 오래된 존재감을 어내고 있다>

  <아빠가 사 온 아이스크림은 냉동실 한편에 머물러 있다>

  <아빠가 사 온 아이스크림은 냉동실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저마다의 어휘에 따라 더 많은 문장이 나올 수 있다. 외국어를 배우는 중인 사람에게 이 문장을 보여주면서 외국어로 표현하라 할 때 '며칠째'가 '오랫동안'은 될 수 있어도, '오래된 존재감'까지 나아가기엔 시간이 꽤나 걸린다. 외국어를 웬만큼 배운들 모국어로 글 쓸 때와 외국어로 글 쓸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일상 대화에서는 "아빠가 맛없는 아이스크림을 사 와서 아무도 안 먹네. 며칠째 냉동실에 있어." 이렇게 말 그만이다. 하나 발화로 그치는 대화 글은 다르다.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인 '글'에서는 표현 하나의 차이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국 문학을 읽다 말고 기막힌 표현에 감탄한 경험은 분명 있을 테다.


  소설가는 모국어를 일상에서는 물론 머릿속에서도 자주 굴리 '표현'해 내는 데 주력한다. 모국어를 많이 들여다본 만큼 기막힌 표현도 가능한 거다. 의외로 나는 이러한 순간을 소설가가 아닌 이들의 글에서도 자주 겪었다. 친구가 건네준 편지, 타인이 인터넷에 써낸 글, 가족이 보낸 문자 메시지 등에서 말이다. 표현 아닌 '내용' 주력함에도 들이 모국어 화자이기 때문에 나는 상 속에서 기막힌 아름다움을 종종 느낄 수 있다.




  23년째 한국어 화자로 살아온 나는 계속해서 모국어를 공부하는 중이다. 외국어 학습엔 끝이 없다는 말 당연하다 면서 '모국어'와 '공부'를 결합해서 바라보는 건 어색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을 테다 . 모국어 단어를 1000개 알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외국어 학습은 이미 알고 있는 1000개의 단어를 다른 형태로 외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모국어 단어를 1000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단어를 10개익혀훨씬 많은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외국어를 배우기보단 모국어를 더 익히길 결정했다. 애정하는 글쓰기가 내 모국어 연습의 방법이 어주고 있다. 


  <모국어 사전>이란 매거진은 연습의 결과물이다. ㄱ에서부터 ㅆ까지 19개의 자음에 주목해, 해당 자음의 단어를 골라 자음별로 글을 썼다. 마다 담고자 한 주제는 있지만 호소력이며 전달력이 그리 강해 보이 거 같다. 주제를 제1의 목적으로 두고 글을 쓰지 않아서다. 그저 나의 모국어 연습을 통해 모국어 화자로서의 자부심을 담아내고 싶었다. 모국어를 이용하는 글쓰기가 !


자수와 글쓰기의 공통점. 촘촘할수록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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