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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24. 2023

너에게 하고픈 말은 아무튼,

[ㅏ] 아무튼 
뒤엉킨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튀어나오는 표현


紅. 네 이름의 한자를 물어볼 만큼 너와 가까워지는 데는 실패했지. 제멋대로 대입해 보는 거야, 아마도 紅일 거라고. 너 때문에 내 뺨이 달아오른 순간이 잦았기에 너는 내 기억 속에서 붉은색으로 덧칠해져 있거든. 당연 너의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얼굴 말고 네 옆을 둥둥 떠다니는 공기방울의 색 말이야. 멀리서 봤을 때 .. 와 .. 같다면 내 노림수가 통한 거야. 뒤늦은 사과와 .. 을 전해.


  紅은 내 이상형과는 완전히 빗나가는 친구였다. 그 애와 보낸 시간의 전이든, 후든 내 취향은 일관된 분위기를 갖추었다. 무엇보다 눈에 담고 기억하기도 전에 대뜸 가까워진 관계에 마음은 갈피를 잃었다. "紅이 날 좋아하나?" 싶은 궁금증보다 "나는 紅을 좋아하나?"라는 물음이 더 궁금했다. 내가 만들어낸 질문인데도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사진을 백업해 둔 마이박스에 들어가면 '나'라는 파일 하나가 있다. 셀카를 자주 찍는 편도 아니거니와 프사로 할 정도의 용기도 없으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이 생겼다 하면 그 파일에 백업을 해 둔다. 紅과는 15살과 16살의 시간을 함께 했다. 구구절절한 고백이야, 성인인 내가 紅을 그리워하며 할 수 있는 표현이고, 중학생의 사고로는 "紅은 내게 어떤 마음일까? 나와 紅은 무슨 사이일까?" 딱 이 정도밖에 하질 못했다. 紅 생각이 날 때면 마이박스에 들어가 당시의 내 얼굴을 본다. 紅의 앳된 얼굴을 영영 까먹지 못하는 것처럼 紅에게도 사진 속 내 어린 얼굴이 익숙할까 궁금해서다. 




  우리 중학교는 남녀 분반이었는데 신청을 받아 운영되는 방과 후 교실은 남녀가 함께 들었다. 紅의 존재는 그곳에서 알게 됐고 내 친구의 친구이기도 했다. 친구는 紅을 좋아한다고 내내 말했으면서 다른 학교의 남학생과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가 紅을 좋아하는 건 나도 알고, 紅도 알고, 다른 이들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 '느닷없음'을 공유한 순간 紅과는 얼굴만 아는 사이 그 이상이 될 수 있었다. 친구는 연애를 즐기기 바빴는데도 이런 변화에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너는 걜 좋아해?"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아니?"라고만 답했다. 그만큼 紅에게는 딱히 내숭 같은 걸 부리지도, 잘 보일 생각도 하질 않았다. 


  紅이 복도에서 인사할 때면 고개를 돌렸다. 紅은 노는 애들과도 아는 사이였고, 새가슴이었던 나는 그 애들의 시선에 들고 싶지 않았다. 노는 애들이 다 하교한 방과 후 때는 紅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까 인사를 무시했어도 군말 없이 또 인사를 건네는 紅의 웃음에 가슴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하루는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집에 가다가 저만치서 걸어가는 紅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紅은 뒤돌아 섰고 내가 옆에 오기까지 기다렸다. 콜라맛 젤리를 먹고 있던 紅이 "너도 먹을래?"라 물어봤다. 얼굴을 맞댄 상황에서, 인사 말고 나눈 대화는 이 날의 하굣길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학교가 끝난 낮 시간대에만 짧게 카톡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방학식 날은 해가 다 진 밤이 돼서야 紅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일, 도서관에서 만나지 않을래?"라는 말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紅은 내가 도서관에 자주 간다는 점에 자기는 그렇지 않다며 신기해했었다. 도서관을 가지도 않는 애가 도서관에서 보자니, 바로 답할 수 없었다. 하나 카톡의 치명적인 단점은 읽는 순간 1이 사라진다는 거였다. "그래"라는 한 마디가 나오지 않아서 생뚱맞은 말을 던져 버렸다. "너 같이 잘생긴 애가 왜 날 만나려 하니?" 紅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내 눈에도 잘생긴 외양이었다. 한 번도 티 낸 적 없는 생각이 표출되자 두 눈이 질끈 감겨버렸다. "왜 그런 말을 해...." 紅의 반응을 끝으로 졸업 전까지는 수시로 눈만 마주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紅은 남고에 진학했다고 들었다. 紅이 진학한 학교도, 내가 다닌 공학도 우리의 중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은 가야 나오는 거리였다. 둘 다 통학생인 탓인가 紅과 마주칠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紅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지만 그때와 변함없는 이유로, 紅의 훤칠함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키가 커버린 紅에 비해 더 이상 자라지 않은 내 작은 키가 그리도 초라해 보였다.


  紅이 여전히 이 동네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수의 친구들처럼 대학이든 취업이든 다른 이유로 떠났으리라 예감해 본다. 그날, 다시 말할 기회를 놓쳐버리며 紅과 마주친 그 정거장에서 서성이는 찌질한 버릇이 생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시내 버스 탈 일도 확연히 줄었지만, 가끔 우리 집에서 두 정거장은 떨어진 그곳에서 내려 본다. 紅과 마주치진 않을까 싶은 불안 섞인 기대를 떨치지 못하는 찌질이라서.


  紅은 때때로 꿈에 찾아와 예의 그 웃음을 보여준다. 紅을 좋아했다는 걸, 좋아한다는 걸 일찍 인정했더라면 紅에 대해 더 알 수 있었을 텐데. 紅과의 연락이 편안했던 건 내게 없던 공감과 다정 때문이었음에도, 멋모르던 10대는 그 겉을 둘러싼 외모만 보고 피했다. 나와 시간과 감정을 주고받은 이들 중 紅만큼 근황이 궁금한 이가 없다. 때때로 꿈에 찾아와 웃음을 건네주기에 까먹을 수도 없다. 15살에 품은 본심을 스스로 알아차리기까지 오래 걸렸다. 불과 작년인 스물두 살이 돼서야 "아, 나는 紅을 좋아했구나!"라는 걸 깨달았으니.


  네 인사를 받지도 않았고, 눈이 마주쳤다 하면 고개 돌리기 바빴고, 네 연락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결국에는 요상한 발언까지 하고 말았다. 그런데, 네가 선도부로 문 앞을 지키던 날에 꼭 지각하게 되는 게 너무나도 창피했다. 교우 관계가 꼬였으니 혼자 다니는 건 괜찮았는데 하필 네 앞을 지나가는 순간만은 짜증 나게 부끄러웠다. 너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난 널 좋아했고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아무튼, 다정다감한 네가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다!


우리 고등학교엔 이런 공간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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