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놀림을 당했을 때 하는 말

by 밀과참

우리 집안에는 농사꾼의 피가 흐른다.


우리 가족이 같은 충청도인이라 한들 부모자식 간에 태어난 곳은 다르다. 나와 언니는 충청도의 '청'에 해당하는 청주시에서 태어난 나름의 도시 소녀들이다. 엄마는 증평군 출신이나 읍내 주변에서 거주했다. 도시는 아닐지언정 그렇다고 시골 출신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빠는 증평 바로 옆에 있는 괴산군에서 태어났는데 그 안에서도 '골'로 끝나는 산골짜기에서 자랐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깡시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만 고등학생 때 시내로 나와 자취를 시작했으니 아빠를 산골 소년이라 보기는 애매하다.


아빠의 부모이신 나의 친조부모님은 고추 농사가 생업이셨다. 굽이굽이 산골짜기 들어가는 것도 일이었지만 땡볕 더위에 고추 따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건 없었다. 어른들은 알아서 조심하나, 어린애들은 그리 잔소리를 듣고도 고추 딴 손을 얼굴에 갖다 대기 일쑤였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주렁주렁 매달린 새빨간 고추는 보는 것만으로도 더 땀이 흐르게 만들었다. 요즘 20대들은 돈 주고 한다는 '농활(* 농민학생연대활동, 대학생들이 농촌에 가서 일손을 도우며 유대감을 쌓음)'을 어릴 때부터 경험한 셈이다.


친조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막내인 작은 아버지가 농지를 물려받으셨다. 이 시기를 전후로 아빠는 우리 집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에 이르렀다.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고 사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알지 못한 채 간간이 얼굴만 비추는 사이였다. 호출에 따라가긴 했지만 상복을 입고 묵묵히 서 있는 아빠의 존재는 왠지 모르게 낯설게 다가왔다. 친가와 연락이 끊긴 지도 한참이라 말 거는 사촌 동생들이며, 얼굴이 희미해진 어른들도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내게는 외가만이 친근했기에 외가 어른들이 조문 오셨을 때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농사를 도운 지 오래되긴 했어도, 이젠 농사와 엮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하나 몇 년 후, 작은 이모네가 과수원을 시작하시면서 농사는 다시 내 일상에 똑똑 문을 두드렸다. 사과를 따는 일은 고추를 따는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빨간색이라 할지언정 채도 높은 빨간 고추보다 노란빛도 섞여 있는 빨간 사과가 더 보기 좋았다. 땡볕 더위 말고 가을, 그것도 해뜨기 전이라 아직은 쌀쌀한 공기에 장갑 끼고 사과 따는 일은 왠지 모를 위안이 되어 주었다. 사과 언제 따러 가냐고 보챌 만큼 이모네 과수원은 자주 찾아가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 좋아하는 장소에서 나보다 나이가 훨 많은 어른들을 앞에 두고 버럭! 성질낸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엄마는 내게 배운 신조어 '갑분싸'를 써먹으면서 "네가 분위기를 갑분싸로 만들었다"라고 타박했지만 당시도 지금도 내 행동은 타당했다고 본다. 아니, 글쎄, 어른들이 먼저 그랬잖아요!




우리 엄마는 농담을 좋아하고 엄마의 친정 어른들도 농담을 즐겨하신다. 어릴 때부터 하도 겪어와서 나 또한 익숙하긴 한데, 어른들의 농담은 내 또래의 농담과 수위가 다르니 듣고도 웃음이 나지는 않는다. 내게는 마냥 불쾌하게 다가오는데 어른들은 재밌다고 손뼉을 쳐댄다. 흥이다. 내가 어른들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른들도 내 재미없는 반응에는 콧방귀를 뀌신다. 이날은 아빠가 작은 아빠의 농사를 돕는 대신 과수원행(行)에 함께한 날이었다. 농사꾼 집안에서 자란 아빠는 "일 잘한다" "손 빠르다"는 소리를 들으며 부단히 움직였다. 아빠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회사 말고 일하는 만큼 돈 벌 수 있는 직종들을 전전하여 밥 먹는 것도 무척이나 빠르다. 여느 때처럼 후루룩 밥을 먹고 일어선 아빠에게 어른들이 농담을 던졌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잠자코 있던 내가 어른들의 발언을 꼬집으면서 분위기는 싸해지고 말았다. 어른들은 농담이라 했고 나도 농담인 걸 알고 있었다. 하나 어른들끼리 있을 때면 몰라도, 딸인 내가 버젓이 있는데 우리 아빠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아빠네 친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가 식구들만 모인 마당에 수더분하고 말수 적다는 이유로 아빠가 놀림받는 게 불쾌했다. "일 잘하는 우리 아빠 놀리지 말고 일 못하는 삼촌이나 다그치라"는 반격은 싹수가 없기는 했다. 난 더 이상 꼬꼬마도, 10대 소녀도 아니었다. 내가 20대 성인이 된 것처럼 우리 아빠도 철부지에서 벗어난 50대의 중년이었다. 어른 대 젊은이면 참았겠지만 우리 아빠도 어른이었다. 어른들의 말이 딸인 내 귀에는 불쾌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엄마에게 엄청 혼났다. 하루치 일이 마무리되고 이모네에 머물 예정인 엄마와 데면데면한 상태로 헤어졌다. 나와 아빠는 청주로 돌아오기로 했다. 차 안에서 아빠와 단둘이 있게 되자 대놓고 열불을 냈다. "아빠는 어른들이 저러는 거에 화나지도 않아?!"라는 내 짜증에 돌아오는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아이구~ 화날 것도 많다~


농사에 한해서는 손도 빠르고, 밥 먹는 것도 빠르면서 이 말 한마디는 어찌나 느리게 뱉던지. 아빠의 충청도 바이브에 내가 지고 말았다. 아빠는 폭발하면 그 불길이 지나쳐서 그렇지, 남들에 비해 화나는 횟수가 심히 적은 편이다. 아빠와 함께 살다 보니 속 터지는 순간도 늘지만 그만큼 나도 화내는 게 점차 줄어들고는 있다. 아빠와 가장 사이가 멀었던 고등학생 때 내 성깔은... 왜 그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칠칠이, 또 화났다"며 친구들이 놀랄 상황에도 "그랴~"하고 넘기게 됐다. 대학 가서 온갖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니 내 옅디 옅은 충청도 사투리에도 웃는 사람들이 생겼다. 한 번은 "농사꾼 말투"라는 수식을 들었다. 역시 농사꾼 DNA는 못 감추나 보다.


내가 '성인군자' 소리를 듣게 되기까지 톡톡한 공을 세워 준 아빠에게 감사를. 화 적게 내고 오래 살 테니, 아빠도 운전할 때만큼은 성질을 좀 죽이시와요.


밥 먹었는지 확인하는 게 아빠의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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