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는 언어를 공유하는 중

by 밀과참

걸음마보다 말이 빨랐던 아기는 읽기와 쓰기를 즐기는 어린이로 자랐다. 유년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마 따라 대형 마트나 은행에 가는 날이면 읽고 싶은 책들이 생겼다. 장난감 코너 근처에는 도서 코너가 있었고 형형색색의 아동 만화책들만 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심지어 갈 때마다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엄마가 매일 방문해야 하는 은행 옆에는 서점이 자리했다. 여기엔 더 많은 책들이 있었다. 집에서는 엄마가 사준 만화책을, 밖에서는 도서관의 책들(* 어김없이 만화책, 때로는 나이에 맞지 않는 동화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운 좋게도 엄마의 근무지 옆에는 시립 도서관이 있었다. 1층 아동 자료실은 6시면 문을 닫았고 우리 엄마 퇴근 시간도 6시였다.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날에는 텔레비전으로 아동용 만화는 물론 드라마도 즐겨 보았다. 직접 상황을 그려보기도 했다. 마론 인형을 비롯한 인형들이 연출을 도와주었다.


읽기와 쓰기는 이런데, '말하기'만큼은 날이 갈수록 고난도가 되었다. 말이 빨리 텄다는 아기 시절의 성취가 무색하게 "엄마!"를 제외한 말들은 어렵기만 했다. 직접 발화하지 않고 입술 언저리에서만 문장을 굴리는 순간이 늘어났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상대와의 대화보다는 고정되어 있는 글, 저 혼자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 머릿속의 생각으로 언어를 접하는 게 편했다. 데면데면한 친구에게도 편지 쓰는 일은 어렵지 않을 만큼 쓰기는 말하기를 대신해 내 체면을 살려주었다. 읽기는 내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다만 아빠에게 편지 쓰는 건 심히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친구는 아무리 어색해도 매일 얼굴을 마주하니 조금만 관찰하면 "너는 어떻다"라고 써낼 수 있었는데 아빠는 달랐다. 일주일에 두어 번, 심하게는 몇 주에 한 번 꼴로 만나는 데다 그 만남의 시간조차 어째 짧아지기 일쑤였다. 아빠의 생일은 해마다 돌아오고, 내 어버이는 두 사람이니 어버이날에는 아빠도 챙겨야겠는데 할 말이 없었다. 오만가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빠'가 주제로 치고 들어오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은 희미한 기체에 불과해 나조차 읽어낼 수 없었다.


<아빠한테 할 말이 없다>는 건 생각 많고 (하고픈) 말도 많던 내게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한 번은 인터넷을 뒤져 '아빠'를 그리는 시를 찾아 건넸다. 고마워하는 아빠의 반응에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텁텁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날마다 티키타카하는 엄마에게 건네는 편지와 아빠에게 띠리링 전송하는 메시지(* 특별한 날에도 같이 있진 못해 연락으로만 축하를 건넸다)의 글자수는 민망하리만치 차이가 컸다. "어째 아빠를 차별하는 못난 딸 같군...." 싶은 반성이 들었다. 대화는 자주 못 나누더라도, 엄마와 내가 주고받으면서 내 수단이기도 한 편지만은 아빠와의 관계에 개입되길 바랐다.




아빠와 엄마의 사이가 좋던 어느 날이었다. "이제 가봐야 된다"며 신발을 신는 아빠를 배웅하려 했다. 그때도 아빠는 드문드문 본 대상에 그지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빠와 더 있고 싶어졌다. 아빠가 저 문으로 또 나가버리는 게 싫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도, 문장 구사에 서툰 유치원생도 아닌, 의젓함을 배워야 하는 초등생은 아빠에게 매달리며 엉엉 우는 수법을 써먹었다. "아빠 가지 마! 가지 말란 말이야!!!"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아빠와 엄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빠와 친하지도 않은 데다가 이런 법이 없었으니 그럴 만했다. 아빠는 도로 집안으로 들어왔고 안 가봐도 괜찮겠냐는 엄마의 걱정에 하루 더 쉬겠다며 누워 버렸다. 아빠 옆에 있으며 느낀 감정은 '안도'가 아니었다. 어차피 하룻밤 지나면 아빠는 또 집을 나설 테고, 얼마 안 있어 어김없이 자취를 감출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마 '희열'을 느낀 게 아닐까 싶다. 나의 말이 아빠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희열 말이다.


그 희열은 다시금 찾아오질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아빠는 '혈연관계로 맺어진 부모' 혹은 '엄마의 법적 상 배우자'란 정의에 그쳐가고 있었다. 엄마와는 각양각색의 추억을 공유하는데 아빠와는 매번 똑같은 상황만을 반복했다. 언제나 오랜만인 아빠가 건네는 용돈이며 나 먹으라고 사 오는 음식이 지겨워졌다. 아무런 충족이 되어주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사욕을 채울 수 있는 돈도,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그깟 돈과 음식은 내 오랜 결핍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아빠란 대상에 나는 묘한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결핍을 인정하자 아빠에게 하고픈 말이 샘솟았다. 성인이 돼서야 아빠에게 줄글의 편지를 건넬 수 있었다.


그런데도 희열이 '여태껏' 찾아오지 않은 건 아빠와 나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굴러가진 못해서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글을 동무 삼아 자라왔지만, 아빠는 글이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전전했다. 공사판에 장시간 있느라 먹먹해진 귀와 길어질수록 바스러지는 아빠의 문장들은 낯설 때가 많다. 그렇기에 아빠에게 편지를 건넨들 아무런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 아빠는 내 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곁에 아빠가 없었던 세월들, 아빠를 머릿속에서만 곱씹어 보던 나날들을 털어놓으면 아빠는 어려워하는 눈치다. "칠칠이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당황해 한다. 인터넷에서 아빠란 주제로 긁어 왔던 시가 아빠에게는 더 쉬운 글이었을 테다.


하지만 괜찮다. 스무 살이 되면서 아빠와 많은 시간을 공유하게 됐다. 매주 주말 이틀, 때로는 사흘에서 나흘까지도 함께 있는다. 아빠는 더 이상 내가 모르는 곳들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아빠의 근무지를 알고 있으며 토요일 낮 작업이 끝나는 순간 내게 올 것을 알고 있다. 이전처럼 서프라이즈로 나타나는 게 아니니 놀랄 필요도, 낯설어할 이유도 없다. 나는 아빠의 귀가를 기다린다. 차근차근 내 언어를 아빠에게 들려주면 희열이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 믿는다. 내 짙은 눈썹과 도톰한 입술과 콕콕 박힌 점들은 다름 아닌 우리 아빠의 자식이기에 얻은 산물이다. 아빠의 얼굴엔 내 얼굴이 담겨 있으며, 내 얼굴이 아빠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는데 언어가 어긋나는 것 정도야 뭔 문제겠는가. 아빠의 언어와 나의 언어는 점차 비슷해질 테다.


아빠가 사준 운동화를 신고 등교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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