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나는 점박이 부녀여유

by 밀과참

10살 때 곱상한 생김새의 아이가 내 단짝이었다. 아무리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태어났다 한들 친구를 얼굴만 보고 사귈 생각은 한 적 없었고 그런 편견도 품지 못한 나이였다. 그럼에도 이 친구의 얼굴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박혀 있다. 뽀얀 피부와 대조되는 코에 자리한 선명한 점, 이와 어우러지는 채도 높은 입술색을 소유한 친구였다. 이런 생김새가 드문 건 아니지만 화장이란 것과 거리가 먼 나이에 봐 온 '남자아이'여서 인상이 짙게 남은 게 아닐까 싶다.


당시 예능에선 '제국의 아이들'의 '동준'이란 멤버가 배우 '한가인'의 닮은꼴로 출연한 바 있었다. '한가인'이란 배우가 그리 유명하다는데 나는 이 방송을 통해 처음 알았다. '한가인' 하면 따라오는 점은 친구의 얼굴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이 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친구에게 연예인 이름 대가면서 네 점이 얼마나 특별한지 일러 주었다. 학급 남자아이들과 다른 유약(弱)한 분위기가 괴롭힘의 표적이 될까 봐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불과 1년 전의 내가 못된 남자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더 신경이 쓰였다. 친구가 쌈닭처럼 군 순간도 기억에 남은 거 보면 친구는 나와 달리 강한 아이였나 보다.




친구의 점처럼 코에 자리하진 않으나 내게도 콧대 부근에 진한 점이 있다. 이 점이 생긴 걸 알았을 때 쏠랑 전학 가버린 친구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다만 친구처럼 특별하다고 볼 순 없다. 내 얼굴엔 꽤나 많은 점들이 분포해 있어서다. 콧대 부근은 물론 눈 밑, 입술 위, 턱, 눈썹 가까이에 골고루 찍혀 있으며 면적이 넓은 볼에는 그 수가 더 많다. 친구의 점은 그 유명한 '매력점'이라면, 나의 점들은 '별자리점'인 셈이다. 점들을 이으면 정말로, 별자리처럼 특이한 모양새가 나온다.


요즘은 화장품을 이용해 점을 찍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점을 문신으로 새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유행이 점박이로 살아온 내겐 반가운 일이긴 하다만, 엄마는 영 탐탁지 않아 한다. 엄마는 '점'을 좋아하지 않아서다. "점이 없으면 더 좋지"보단 "점 보기 싫으니까 빼!"로 불호가 꽤나 심하다. 그런 엄마 곁에 점박이 아빠가 있고 그런 아빠를 닮은 점박이 딸이 있으니 웃기다. 나는 엄마의 딸로 태어난지라 점 몇 개 생긴다 해서 점 빼라는 닦달만 들을 뿐이지 갈라설 위험까진 없다. 다만 아빠는 결혼하기 전, 즉 법적 부부가 되기 전부터 점이 많았고 아빠의 이 같은 특징은 엄마 눈에 꽤나 거슬린 모양이었다.


청년은 여인의 마음을 사고자 애썼다. 다행히 청년의 이목구비가 여인의 취향이긴 했다만, 생김새에 민감한 여인은 단순한 '얼빠'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청년의 말수 적은 특징과, 분식을 고집하는 입맛은 호감도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여인은 청년의 얼굴을 가리켜 "점을 뺐으면 좋겠다"라는 솔직함을 던졌다. 아마 그 순간이 아빠가 당신의 얼굴을 가장 오랫동안 관찰한 날이지 않을까 싶다. 똑같이 '점박이'라 표현하긴 했으나, 아빠는 나보다 몇 배는 점이 많다. 이 같은 특출 난 점박이가 된 데는 엄마의 말이 톡톡한 기여를 했다. 엄마의 말을 듣고는 얼굴에 있는 점들을 다 뺀 채 다음 데이트 때 나타났단다. 다만 다 빼버리자 점이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겨났다는 슬픈 이야기. 원래 점이 돌아온 건 물론 불어나기까지 했으니 여인은 질색팔색하였지만 원인이 자기자신인 탓에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외모지상주의는 내가 초등학생 때건, 대학생인 현재건 뿌리 뽑히지 않고 있다. 어릴 때는 "예쁘다" "못생겼다"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근래는 이것까지 평가 대상인지 눈을 의심할 만큼 신체의 오만 부위에 주목하며 "어디는 예쁘다" "어디는 못생겼다" 꼼꼼하게 나눠댄다. 이 같은 사회에 강력한 반기를 흔들고 있지만 집안에서만큼은 지나친 '얼평가'가 되고 만다. 모순적이게도 얼평을 그치지 않는 건 우리 가족 얼굴이 재미난 관찰 대상이 되어서다.


아빠와 한 집에서 살지 않을 때 내게 익숙한 얼굴은 엄마와 언니 얼굴뿐이었다. 엄마와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으면서도 인정하진 못했다. 사람들은 분위기를 보았지만 엄마 껌딱지는 엄마의 생김새를 눈에 담아왔다. 엄마의 이목구비와 내 이목구비는 안 맞아 보였다. 엄마의 날카로운 콧방울과 대비되는 내 둥그런 콧방울 같은 거 말이다. 연한 눈썹의 엄마가 가장 예뻐한 건 내 짙은 눈썹이었다. 나도 남들처럼 눈썹 다듬고 연하게 그리고 싶은데 엄마는 지금까지 눈썹에 칼 대는 걸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아빠가 존재감을 나타내면서 의문도 차차 풀렸다. 엄마랑 끼우지 못한 퍼즐들은 아빠 사이로 돌리면 됐다. 여인의 관심을 샀던 분위기는 세월의 풍파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나 딸의 눈으론 새까맣게 타버린 피부색과 점점 깊어지는 주름을 걷어낼 수 있다. 아빠의 이목구비가 익숙해지자 "나는 아빠와 엄마를 골고루 닮은 거네!" 탄식했다. 퍼즐이 맞춰져 즐거운 한편, 탄식이 나온 건 이 사회가 뿌리 깊은 외모지상주의여서다. 우리 엄마는 깜찍하고 우리 아빠는 곱상하다(*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었음). 둘 중 한 사람만 닮았어도 외모 콤플렉스를 겪을 일은 없었을 테다. 한창 예민한 10대 때는 내 얼굴이 너무 싫었다. 그런 한탄에 부모님은 한 번도 공감해 준 적 없었다. '우씨, 얼굴이 잘났으니 당연 공감을 못하지!' 투덜거리며 노려봤다.


그렇다고 얼굴 바꿔주겠다는 기회에 좋다고 매달릴 일은 없다. 내 얼굴은 깜찍한 여성과 곱상한 남성이 부부를 넘어 부모라는 증좌이기도 하다. 깜찍한 엄마와 곱상한 아빠, 예쁜 첫째 딸과 어중간하게 잘생긴 둘째 딸(* 유전자 배합의 오류인지 잘생겼다는 소리를 더 듣는다....)의 조합인 우리 가족. 그렇지만 언니는 나와 달리 점은 없다. 백구 엄마와, 흑구에 가까운 점박이 아빠 사이에서, 적당한 점박이로 태어난 건 둘째만의 특징이기도 한 셈이다. <나의 점>은 특별하지 않지만 <나와 아빠의 점>으로 확장하면 특별함이 더해진다.


오늘도 나는 엄마의 얼굴과 아빠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한다. 내가 그들의 딸인 게 좋아서.


버스 타고 이동 중일 때면 꼭 걸려 오는 아빠의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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