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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Aug 27. 2023

某야, 네 친절함은 무적이야

[ㅑ] 야
한 단어로 말하기보단
이름의 뒷받침으로 쓰면 더 좋은 음절


某야, 소심하다는 게 크나 큰 약점이 되던 나이에 네가 베풀던 친절을 기억하니. 너는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것만 같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친절함이었으니 스스로는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 네가 놀려먹지 않은 한 동급생은 네 덕에 친절이 가장 필요한 힘이란 걸 배웠어. 너의 면모는 나 말고도 또 다른 소심이들에게 변화를 주었으리라 믿어. 대표로 뒤늦은 감사를 전해.


  <>, 이 말은 잘 써먹지 않으며 모음 중에서 유난히 싫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면 <야>가 튀어나올 거 같은데 옛 기억 탓인지 "야!" "이 새끼야!" 식으로 욕이 나오진 않는다. "이 새끼가?"라고 '야' 대신 '가'라는 주격 조사가 끝에 자리한다. <야>는 우리 언니에게서 지겹도록 들었고, 듣고 있다. 버젓이 있는 동생 이름 대신 왜 <야>를 선호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거야 언니의 방식이니 별 수 없다.


  이외에 초등학교 다닐 적 남학생들에게 자주 들었다. 기분 좋을 때건 화날 때건 수시로 "야!" 뱉어대는 그들을 보며 쫄기 바빴다. 나는 초등 여학생의 공통 별명이나 다름없는 '조폭 마누라' 소리를 들 일도 없었다. 그 정도로 소심한 이에게 남학생은 무서운 존재였다. 친절한 남학생들도 많았고, 친해진 남학생들도 있었지만 폭력적인 남학생들에게 시달린 충격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나이가 두 자릿수도 아니고 한 자리던 9살 때, "야!" 소리치면서 손찌검을 휘두르려 한 아이와, 내가 뒤돌아 서자 날 발로 깐 아이가 있었다. 이 둘의 얼굴은 영영 까먹지 못한다. 9살밖에 안 된 자식들이! 스물세 살의 여성은 오늘도 이 어린놈들을 혼내킨다.


  중학교는 남녀 분반이어서 마주칠 때만 겁먹었다. 고등학생 때는 합반이라 남학생들과 같이 생활하였다. 17살에서 19살의 남학생들은 친한 여학생들에게만 야야 거렸다. 어색한 사이인 내게는 이름을 부르며 대했기에 겁을 덜 먹었다.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남자 선배들에게 "우리 중에 누가 제일 잘생겼어요?" 같은 시답잖은 소리를 들은 적 있다. 이런 말을 들으니 눈살은 찌푸려져도 무섭진 않아 졌다. 복도에서 1학년들 얼굴 관찰하고 삥까지 뜯던 중학교 남자 선배들보다야 훨 나았다.




  초등학생 때는 스스로를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짐)'라 착각하였다. 색다른 감정이 들었다 하면 무조건 폴인럽이라 정의 내렸지만 금사빠라는 건 변치 않는 기질이다. 머나먼 과거에만 금사빠였던 걸로 보아 친절한 남학생과 있을 때의 '안정'을 호감이라고 오인한 게 아닌가 싶다. 하여간 이 9살밖에 안 된 자식들은 이후에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괴롭힘 이후 10살, 11살, 12살, 13살 매해 내가 좋아한다고 착각한 어린이들의 공통점은 '친절'뿐이다. 어린이라 부르니 스물세 살의 여성이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라... 일관되게 某라 지칭하련다. 10살의 某와 13살의 某는 피부가 하얬는데, 11살의 某와 12살의 某는 학급에서 가장 까만 피부였다. 키도 제각각, 체격도 제각각, 목소리도 제각각. '친절' 빼면 공통점이랄 게 없었다. 즉 이들은 나를 놀려먹지 않았다.


  네 사람 중 가까이 지낸 건 10살 某와 11살 某다. 12살 某와 13살 某는 <잘 나가는데 폭력적이지 않은> 희귀 케이스였다. 초등학교에도 서열이란 건 또렷하게 존재한다. 현재 회고 중인 나는 성인이니 "으이구!"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매일 등교해야 했던 초등생에겐 이 벽이 꽤나 크고도 무서웠다. 초중고 내내 나의 기피 대상 1위는 '일진'이었다... '착한 어린이 일진'이란 표현이 웃기긴 한데 그들도 어쨌든 일진 무리니까 친해지 않았다.


  10살 某와 11살 某에게는 마음을 열어젖힌 수준이었다. 이들과 동질감이 자리한다는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초등학교의 또 다른 문제점은 가정 형편이며 환경이 딱히 가려지지 못한다는 거다. 10살의 某는 아빠와 떨어져 살았고, 11살의 某는 엄마와 형이랑만 산다고 들었다. 10살 某가 개학날 "아빠를 보러 해외에 다녀왔어"라고 하였는데 몇몇 친구들이 믿질 않았다. "너 아빠 없으면서 왜 거짓말하냐!" 이런 어감의 말들이 오갔다. 사실 여부보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데에 나까지 기분이 확 나빠졌다. 남학생들의 놀림조에 어김없이 질리고 말았다. 나 또한 아빠와 같이 살고 있지 않아도 놀러 다녔으니, 믿지 못하는 이들이 도리어 바보 같이 느껴졌다.


  11살 某는 자신을 둘러싼 말들에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하루는 11살 某의 동네로 넘어갈 일이 있었다.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으로 들어간지라 을 정확히 알게 됐다. 당시 나도 주택에 세 들어 살고 있어서 괜히 반가웠다. 내가 뭐라 떠들 줄 알고 주거지를 드러낸 11살 某의 당당함에 놀라기도 했다. (당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1살 某는 피어싱을 꼈고 옷차림도 신경 썼으며 체육에 타고나 인기까지 많았다. 그런데도 잘 나가는 무리에는 합류할 흥미가 없어 보였다. 주변엔 부모의 힘과 자신의 힘을 대놓고 자랑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11살 某는 그 애들과는 다른 요소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네 자신감이 제일 빛난다고 엄지를 치켜들게 만드는 힘이 11살 某에겐 있었다.


  10살 某는 순했다. 그 순함이 때로는 놀림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10살 某와 친해진 데엔 '약함'이란 공통점도 있는 줄 알았으나 내 오해였다. 어느 날, 10살 某가 남학생과 치고받고 싸웠다. 다치는 게 걱정되는 한편, 10살 某를 다시금 바라볼 수 있었다. 싸울 수 있으면서 잦은 놀림을 견딘 건 인내심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폭력적인 남학생들은 "아 진짜 이런 걸로 화났다고?" 싶금방 화를 냈고 그만큼 금방 풀었다. 10살 某는 참다 참다 화를 내면서도 다른 남학생들처럼 금방 풀었다. 참다 참다 화 한 번 못 내고, 싸우면 풀지도 못하는 나와 확연히 달랐다. 10살 某가 전학 간다고 했을 때 새로운 학교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걱정하진 않았다. 내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라 삐져버린 게 문제였다. 잘 가라는 인사를 끝내 안 건넨 탓에 10살 某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 유치한 마음에 상처라도 받았을까, 10살 某가 떠나버린 후 뒤늦은 걱정에 끙끙 앓았다.


  9살밖에 안 됐다고 언급한 두 꼬맹이를 비롯해 폭력적인 남학생들에 대한 기억은 인당 한 줄 뿐이다. 친절을 베푼 某들이 남긴 억은 몇 단락을 더 회고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다. 단락에서는 친절보다는 매력을 논했다. 某들의 친절이 몸에 뱄기에 친절을 느낀 순간은 지나치게 일상적이어서다. 어찌 됐든 누군가의 친절은 은 인상을 남긴다는 걸 某들을 통해 알았다. 어린 某들의 친절이 그 어떤 요소보다 강한 힘을 지닌 것처럼 친절은 타인을 바꾸고 사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 기억에 생생히 남은 대견한 어린이들에게 오늘도 칭찬을 건넨다. 고마웠다!


다 같은 꿈나무라도 넌 좀 더 푸르른 꿈나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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