波 선생님! 웃기지요? 선생님의 멋들어진 성을 밝히는 대신 성의 앞글자만 따서 이리 칭해 봤어요. 波는 물결이란 뜻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인종도 다르고, 국적도 다른 데다, 성별이며 나이대마저 다 달랐지만 선생님의 존재는 때로는 거센 파도(波濤)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잔잔한 파동(波動)을 일으켰답니다. 전 영어를 여전히 못해요. 그래도 선생님을 잊을 일은 없으니 선생님의 모국어를 언젠가 익혀 보겠어요. I miss you.
대학 강의가 대면으로 전환됐어도 마스크 해제는 나지 않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50분을 내리 졸다가 쉬는 시간이 돼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스크가 표정을 가려주니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강의실 밖으로 나가 바깥공기를 쐬었다. '남은 1시간은 제발 졸지 말자....' 다짐하며 도로 들어가려는데 한 외국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Can you speak English?"라는 확인도 없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눈망울을 바라보며 미치는 줄 알았다. 대학 내에서 길을 찾는 눈치였는데 목적지가 어딘지도 알아듣지 못했고 내 쉬는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쏘↗리,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쉬↘"라 내뱉곤, 내 허접한 발음에 내가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마스크라도 안 썼으면 진심을 담아 미안한 표정이라도 비출 수 있었을 텐데. 괜찮다며 가는 외국인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충격과 부끄러움의 여파로 입이 꽉 다물어진 거였다.
이 일을 겪고 나서 "한국 대학생으로서의 쫀심이 있지! 이 같은 경험은 두 번 다시없을 테다"란 마음 가짐으로 종강 이후 몇 주 간 영단어를 외우기는 했다. 개강하자 전공 공부로 시선을 돌리며 "영어는 조만간...."이라는 지긋지긋하고도 구차한 변명을 내세워 버렸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이날부로 외국인이 영어로 뭔가를 물어본 적은 여태껏 없었다는 거다. '여태껏'이 '영원히'가 될 순 없음을 알고 있다. 영어 공부.... 해야겠지. 해야 된다.
초등 시절 매일 나가던 영어 학원을 관두며 영어는 꾸준히 못하게 됐다. 다만 멋쩍은 실력을 뒤로하고 철면피를 내세운 덕에 영어 선생님들과는 친한 편이었다. 고등학교 진학하면서는 탄식이 나올 지경으로 성적이 떨어졌는데 이상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영어 선생님들께선 날 좋아하셨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특히나 2학년 때 오신 원어민 선생님은 날 복도에서 마주쳤다 하면 전폭적인 응원을 해 주셨다. 당시 수행평가로 <연설 흉내내기>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연설을 찾아 친구들과 선생님들(* 원어민 선생님, 한국인 선생님) 앞에서 따라 하면 됐다. 영어로는 자기소개도 못하면서, 대본 없이 연설을 매끄럽게 선보인악바리가 통했던 모양이다. 연설이 끝나면 선생님들의 영어 질문에 답까지 해야 됐는데 이때는 어.... 어버.. 버 하였다. '아잇, 다 외우면 뭐 하나. 점수 왕창 깎이겠네' 싶은 걱정이 무색하게 고득점을 받으며 편애까지 얻었다. 연설 외우는 데 쏟은 시간으로 사랑을 샀다고 볼 수 있겠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원어민 선생님들은 해마다 한 분씩 계셨다. 波 선생님은 내 나이 16살 때 우리 학교에 오신 분으로 한국어도 유창하셨다. 한국인아내와의 슬하에 두 아이가 있다며 자랑스럽게 사진을보여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학생들은 波 선생님의 존재보다도 아내분과 자제들의 사랑스러움에 환호를 던졌다. 나는 그 무리에 섞인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ㅐ] 편에서 소개한 株로 인해 좀 더 사적인 기억을 쌓게 됐다. 株는 波 선생님과의 방과 후 수업에 날 등록시켰다. 문제는, 영어 잘하는 株는 학생회 회의에 예고 준비로 바빠서 영어 못하는 나 혼자 수업에 들어갈 날이 잦았다는 거다. 선생님도 꽤나 답답하셨는지 나와는97 한국어 3 영어 비율로대화를 나눠주신 덕에겁먹기보단 빵끗빵끗 웃을 수 있었다.
'멍멍이'란 단어를 좋아하게 된 것도 波 선생님 덕분이다. 무심코 "멍멍이가~" 했더니, 波 선생님은 깔깔 웃으시면서 "칠칠이! 멍멍이가 뭐야~"라 하셨다. 뭐가 그리 재밌으신 건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멍멍이는 아기들이 쓰는 말이야. 칠칠이는 아기가 아니잖아"라고 답하셨다. 이때도 선생님의 한국어 실력에 감탄하기 바빴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진 않았다. 사전에 '멍멍이'를 검색하면 <어린아이의 말>이라고 나오는 걸 보면 선생님의 한국어 공부는 정확했지만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화자 아닌가! 이후로 일상생활에서 '멍멍이'란 말이 언제 나오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어른들은 몰라도 내 또래는 자주 쓰는 걸 확인한 후 맘 놓고 쓰게 됐다. 이런 순간이 없었다면 '강아지'나 '멍멍이'나 별 신경 안 쓰고 입에 올렸을 텐데, 波 선생님의 시원한 웃음에 '멍멍이'란 단어가 '강아지'보다 훨씬 좋아지고 말았다.
17살의 어느 날, 사촌 언니와 길을 걷던 중 뜻밖의 동네에서 波 선생님을 마주쳤다. 波 선생님은 장난을 걸며 내게 다가오셨다. 나는 波 선생님인 걸 알아차리고 반가움에 팔짝 뛰려는데, 사촌 언니가 내 팔을 끌어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외국인이 뭘 묻는 것도 아니고 깔깔 웃으며 다가오니 경계하게 됐단다. 서운하게도 波 선생님은 영어로 말을 거셨다. 나는 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말만 간신히 마친 후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이날을 한동안 곱씹게 됐다. 波 선생님은 자제분들과 있었고 나도 일행이 있으니 오래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멍멍이'에 대한 고찰 결과>는 들려 드렸어야 했는데!
막판에는 방과 후 수업에 제대로 출석하지 않았다. 나와 株 말고는 후배들만 있었고 株 없이, 혼자 쭈뼛쭈뼛 들어가 후배들과 달리 한국어로만 말하는 게 어느 순간 부끄러워졌다. 波 선생님이야 내 속내를 모르시니 방과 후 수업에 왜 안 오느냐면서 속상함을 드러내신 적도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죄송하다. 방과 후 수업은 국영수 같은 과목들처럼 정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었다. 波 선생님이 혼자 기획하시곤 개인적으로 신청 받으신 걸로 기억한다. 그 때문에 학생 수가 적음에도 굴러갔고 당연 수업료도 내지 않았다.
모교인 중학교는 학습 분위기가 썩 좋은 학교는 아니었다. 波 선생님은 우리 중학교에 계시기엔 너무 뛰어난 원어민 선생님이 아니셨을까 싶다. 波 선생님의 열정에 따라가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피로에 1인분 이상 영향을 끼친 거 같아 감사한 마음만큼 죄송한 마음도 크다. 波 선생님 덕에 외국인이더는 낯설게 다가오지 않게 됐으니, 보답할 길은 어째 영어 학습뿐이려나. 波 선생님이 내게 어떤 말로 장난을 거셨는지, 이것 말고도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어색한 영어와 선생님의 유창한 한국어가 섞이던 순간마다 내 시야에 꽂힌 선생님의 눈은 아주 잘 기억한다. 장난기와 따스함이 고루 어린 눈망울에 내 낯가림이며 경계심도 사르륵 무너졌으리라. 波 선생님의 멋들어진 이름이 한국에 널리 알려져야 할 텐데. Thank youf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