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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Sep 04. 2023

제자를 와룡으로 바라봐 주는 비룡들께

[ㅘ] 와룡
누워 있으나
용이라는 정체성은 깨달은 상태


후생(後生)을 살 이들에게 선생(先生)이 되고자 자처한 분들만큼 필요한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자 맞닥뜨린 또 다른 소식에 어딘가를 향해 돌멩이라도 던지고 싶어 졌습니다. 신입 선생님들, 10년 이상의 선생님들, 정년을 코앞에 둔 선생님을 연달아 떠나보낸 건 책임감 없는 사회의 역사로 남아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겠지요. 돌멩이를 들었을 때 제 손을 감싸 쥐며 그러지 말라 다독여 주실  분들도 선생님이실 겁니다. 애꿎은 돌멩이를 오랫동안 맞아온 분들 말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튀어나다. 하나 '개천'과 '용'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달리 말할 수 있어서인지 자조(自嘲)를 담아 변화시키게 됐다. 개천의 행복한 '도롱뇽'으로 살겠다거나 '하늘'에서 난 용도 이미 많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동시에 "나는 굳이 용이 되고 싶진 않다!" 굴었는데 어느 날 '용(룡, 龍)'으로 끝나는 다른 표현을 알곤 마음가짐을 바꾸게 되었다. 바로 "누워 있는 용"이라는 뜻의 '와룡(臥龍)'이다. 묻혀 있으나 장차 큰 일을 할 인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도 하는데, 제갈량의 호가 와룡이니 여기서 유래된 게 아닐까 유추해 본다.


  큰 날개를 펼쳐 오르는 게 아니라 누워 있는 용이라니. 나설 시기를 기다리거나 자신감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내 주변에도 와룡인 지인들이 많은데 전자 후자 골고루다. 어찌 됐든 모두가 적당한 때에 날아오르길 기대하고 있다. 나는 어떤가 하면... 잘 모르겠다. '와룡'이란 말이 좋은 건 개천이든 하늘이든 배경의 구애가 달리지 않은 채 '용'이라는 존재만을 부각해서다. 와룡은 이미 용이니 '입룡(立龍)' 후에 '비룡(飛龍)'이 되면 그만이다. 와룡이 비룡이 되기 전에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감이란 게 필히 중요해 보인다.



 

  내 자신감은 중간선에 맞추어져 있다. 꽉 찰수록 좋은 건 알다마는 여기까지 온 것도 내게는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모님은 칭찬에 야박하셨고 또래는 호평과 혹평을 섞어 종잡을 수 없었다. 내 귀는 날 때부터 얇은데 자존감 또한 낮아서 쉽게 휘청였다. 내 자신감의 총량에는 어쩌다 들은 부모님의 칭찬과 또래에게 얻은 호평이 첨가되어 있지만 상당량은 교육 종사자들로부터 나왔다. 일전에 다른 매거진에서 교육자들의 미래 지향적인 태도가 내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내 미래는 이분들인해 타난 셈이다.


  내가 바라보는 나와 선생님이 바라보는 나는 다른 방향성을 띨 때가 잦았다. 칭찬을 들을면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대신 "제가요? 제가 그렇다고요?" 믿질 못하였다. 선생님들은 내 낮은 자존감에 골몰되지 않고, 선생님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에 집중하게끔 애쓰셨다. 한 살 때부터 동네 어린이집에 맡겨진 데다 여태 학생 신분을 졸업하지 못하였으니 한평생 선생님 뒤만 따라다녔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는 회의적이나 그 시간이 헛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건 나보다 앞선(先) 생(生)을 살아온 분들을 날마다 만나는 덕을 보았기 때문이다. 브런치에서 선생님들이란 존재를 꾸준히 추억하는 것도 속 빈 강정이 내 정의가 아님을 그분들이 일깨워 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내 출생지가 개천이든 하늘이든 상관 않고는 북돋아 주셨다. 중학교 3학년 때 방과 후 시간에 토론할 일이 생겼다. 토론 준비를 열심히 하였지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토론자들은 나만큼 준비해 오지 않았고 아예 준비 없이 참석한 친구들도 있어서 혼자만의 독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날 토론을 주최하신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부르시고는 "칠칠이는 이러하니 고등학교 가서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야"라며 믿음을 내비치셨다. 토론은 성취 없이 끝났을지라도 선생님의 응원 덕에 이날을 특별히 기억하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과는 둘이 있는 순간이 잦았다. 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부르실 때도 있었고 수업이 다 끝난 후 남기신 적도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아낀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객관적인 시험 점수가 칭찬 대상으로 거론된 적은 없었다. 지능 대신 내 태도와 학습 결과물만 갖고 논하셨다. '내가 그 정도인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원체 학생들을 후하게 바라보시니, 선생님의 너스레일 거라 여겼다. 선생님은 중학교 졸업식이 다가오는 시기에 내게 책 한 권과 편지 한 통을 건네셨다. 동시에 위 선생님처럼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강조하셨다. 날 향한 선생님의 말씀은 언제고 진심이었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


  초중고 내내 이런 선생님들은 많이 뵈었다. "잘해 왔다"는 과거와 "잘한다"는 현재와 "잘할 거다"라는 미래를 합한 총체적인 힘을 불어주시는 선생님들에게 울컥할 때가 잦았다. 가정환경과 교우 관계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였지만 선생님들과의 관계는 평온한 물결을 타는 나룻배와 같았다. 선생님들의 긍정 마인드는, 또 다른 요소들로 부정을 놓치지 못한 내가 후퇴하는 대신 전진하게 해 주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졸업 사진을 나 홀로 다시 찍을 만큼 얼굴에 드리워진 낯빛을 사진에서조차 숨길 수 없었다.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선생님들은 왜 그리 다시 찍길 바라시는지, 왜 자꾸만 "웃자!"는 말을 건네시는지 짜증도 났다. 몇몇 학생에게 "어이없네. 졸업 사진을 합성할 수도 있는 거였냐?" 시비도 당해 더 위축되었다. 이는 내 어두운 낯빛이 아무 데도 남지 않길 바라는 선생님들의 배려였을 알지 못했다.




  나 자신을 좋아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미성년자 때, 나는 내가 지독히도 싫었다. 가족들은 보통은 날 사랑하였고, 친구들은 보통은 날 우호적으로 대해 주었다. 하나 때때로 그들의 말로 인해 나는 나 자신을 보다 더 싫어하게 되었다. 내재된 자존감이 낮은 탓에 방패 역할을 못해서 그랬다. 그런데 초중고 12년 동안 참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 왔건만 선생님들로 인해 상처받은 적은 한 손가락 꼽 정도도 안 된다는 걸 눈치 채자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선생님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네!"


   선생님과 친하다는 이유로 한 학생이 "너 레즈야?" 물으면서 킬킬댄 적이 있었다. 어느 무리는 내가 선생님들에게 잘 보이려 한다고 아니꼬워하였다. 부모님한테 지적당한 적있었다. 선생님 가시고 나면 울적함에 빠지는 점특히나 이해 못 받았다. 귀가 얇아 눈치는 보였어도 마음을 억누르지는 않았다. 위태롭던 내겐 선생님도 필요했지만 선생님을 좋아하는 마음도 중요하였다. 선물을 모아두는 상자에는 선생님들에게 받은 편지가 무척 많다. 말뿐 아니라 글로도 칭찬을 해주셨다는 뜻이다. 온갖 표현으로 북돋아 주시던 선생님들을 어찌 안 좋아하고 배길 수 있으랴.


  <선생님>은 미숙한 시기에 가족과 친구 외에 가까이할 수 있는 또 다른 존재이다. 내가 겪어온 바, 선생님들은 받는 게 없어도 변함없이 정을 주신다. 처한 환경은 학생마다 다르겠지만 가족과 친구에게 의지하지 못할 때 선생님만은 어깨를 내어 주신다. 학교 밖에서도 교류를 맺으라는 뜻이 아니다. 학생일 적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장소 학교인 만큼 선생님들에게 얻을 수 있는 힘을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게다. 현재의 나는 가족과 친구 관계 모두 괜찮은 편이며 곧 있으면 대학마저 졸업하기에 사제 지간을 맺을 운이 찾아오기는 쉽지 않을 테다. 아쉬움이 들기도 하나, 그간 받은 게 넘치도록 많아서 괜찮다.


  받는 게 없어도 정을 주는 건 <현> 선생님들의 심성에서 나오는 거다. 나는 학교에서 매 맞은 적이 없었지만 과거에는 몽둥이 들고 다니는 교사들이 많지 않았나. 근래 학생에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선생님들이 계신 마당에, 현직 선생님들이 바라시는 건 대중이 혀 끌며 하는 소리와 달리, '처벌의 부활'이 아니라는 데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친구들 중 교사가 꿈인 이들은 실습은 마쳤임용 고시는 아직 보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알게 된 한 살 차이의 언니는 합격한 듯 보였다. 합격 소식을 뽐내던 언니의 카톡 프로필은 49일 동안 추모 사진과 교사 집회 사진으로만 바뀌는 중이다.


  내가 스스로를 개천가 도롱뇽이라 비하할 때마다, 배경은 중요하지 않으며, 언제든 날아오를 수 있는 용이라고 바라봐 주 선생님들께 유난히 죄송해지는 날이다.


오늘 편지의 수취인은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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