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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Sep 03. 2023

오독(誤讀)의 반복은 오독(娛讀)의 밑거름

선생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ㅗ] 오독(誤讀)
동일한 부분을 한 번 더 볼 수 있는 기회
(娛讀의 '오'는 '즐길 오'이며 실제론 없는 단어입니다)


響 선생님. 선생님께선 지금 카메라를 들고 누비실지, 어느 학교의 인기쟁이가 되셨을지 궁금합니다. 저희 학교에 계실 때 보신 말똥한 눈빛들은 흔한 게 아니었습니다. 響 선생님이 가시고 나서는 수업 집중도가 나날이 깎여 가는 게 훤히 보였거든요. 물론 오시기 이전에도 그러하였으니 돌이켜 보면 이건 저희들의 문제였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바람같이 사라지셨다기에는 후유증 또한 오래갔습니다. 響 선생님은 학교가 감사해야 하는 특별한 교사셨어요.


  5학년인가 6학년 때는 20분은 걸어가야 하는 학원에 보내졌다. 거리는 상관 없었다. 걸어가는 방향이 중요했다. 우리 학교 근처면 좋을 것을, 다른 학교 부근이라 학원에서 와 언니만 소속 학교가 달랐다. 학원 등록에 있어 언제고 우선시 되는 건 우리 언니라는 존재였다. 언니가 다니고 있거나 다닐 학원에 +1으로 보내졌고 나는 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엄마의 기대와 달리 친구를 금방 사귀는 언니는 날 챙겨주지 않았으니. 아무튼 학원 선생님은 개념을 익힐 때면 번갈아 가며 낭독을 시키셨다. 느 순간 친하지도 않은 학생들이 날 따라 하기 시작했다. 문장의 마지막 글자인 '-다'를 [다]라 발음하지 않고 [따]라 발음한다고 웃겨했다. 이러한 순간들이 해당 학원싫어진 1등 공신이었지만 의식한 덕에 못된 습관을 눈치챌 수 있었다.


  미성년자 때 친구들과 있을 적엔, <혀 끝이 에 닿는지> 여부가 종종 대화 주제로 올랐다. 더 나아가 <혀 끝이 콧구멍 안에 들어가는지> 단계에는 실패했지만 전 단계도 통과 못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내 혀가 긴 편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았다. 혀가 길면 발음이 좋다는 설(說)까지 주워들은 후로 낭독하는 순간이 덜 민망해졌다. 혀 길이 외에 '-다'를 [따] 말고 [다]로 고치며 창피함이 한 스푼 덜어것도 있었다. 내가 봐도 "따!"보다는 부드러움이 가미된 "했다~"가 훨 듣기 좋았다. 역시 뭐든 부끄러움을 겪어 봐야 늘 수 있다.


  "이 문제는 1n번이 나와서 풀어 보자"보다 "그다음 단락은 1n번이 읽어 볼까?" 하는 지목이 나았을 뿐, 선생님들 입에서 내 학급 번호인 '1n번'이 나오자마자 심장 마구마구 뛰었다. 숫기 없는 학생에게 느닷없는 지목만큼 원치 않은 일은 없었다. 전자의 경우는 정답이 정해져 있으니 맞히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후자의 경우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한글만 알면 문제없으니 덜 절망스럽다가도 묘하게 더 부끄러웠다. 발표 시간도 아닌데 적막한 교실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면 선생님을 제외한 학급 친구들 귀를 다 닫아 버리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18살, 문학 수업에서 어김없이 호명당했다. 쑥스러워하면서 낭독을 마치자 선생님(* 이하 響 선생님)이 감탄하셨다. "이야, 글을 굉장히 잘 읽는구나?" 급작스러운 주목에 열이 오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처음 느껴 보는 색다른 기쁨이 마음을 요동시켰다. 響 선생님은 기존 문학 선생님이 급작스레 병가를 내시면서 오신 분이셨다. 선생님들의 발령에 관해선 손톱만큼도 몰랐지만, 響 선생님은 정식으로 오신 게 아니라 언제 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고 들었다. 響 선생님도 잠깐 머물다 떠날 사람이라는 걸 숨기지 않으셨다. 어느덧 여름 방학이 찾아왔고, "방학 끝나면 쌤도 안 계시려나?"라는 내 궁금증에 친구들은 "아무래도 그럴 거 같"라호응하였다.


  개학날 가장 궁금한 건 <문학 선생님>의 자리였다. 문학 시간이 되자 익숙한 얼굴의 響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들어오셨다. 안심한 것도 잠시, 響 선생님은 중간고사를 대비하기도 전에 가셨다. 그쯤 학교 측에서 '정식' 선생님을 찾은 모양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학기 전후로, 강당에서 인사받으며 떠나시는 게 아니고, 하루아침에 가시는 게 떨떠름하게 다가왔다. 당시 내 눈에는 학교가 響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 속상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교가 고등학교보다 덜 힘들었다. 대학은 각자도생의 성향이 강해 스펙도 알아서 쌓으면 그만이지만 고등학생의 스펙은 '학생부'라는 문서에 깡그리 모여졌다. 출결과 성적 관리를 비롯해 온갖 수행평가와 창체(* 창의적 체험활동)에 시간을 쏟으면서, 수상 이력을 위한 교내 행사챙겨야 했다. 나는 이 같은 열기에 비껴 나오고 싶었지만 봉사라면 몰라도 위의 것들은 선택보다는 필참으로 이루어졌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지목당하는 건 부끄러웠으나 교탁에 서서 친구들  말하는 건 아무렇지 않을 만큼 발표는 일상이 되어갔다. "안녕하세요, 1n번 땡칠칠입니다"로 시작해서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대본을 양산하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響 선생님께서 무심코 던지신 말은 곱씹을 만했다. "발표를 잘하는구나" "PPT를 잘 만드는구나" 같은 말 외에 "글을 잘 읽는구나"라는 칭찬음 들었던 것이다.


  다른 과목들 매 수업 시간이면 한 두 명 혹은 한 모둠씩 발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생활기록부에 가장 민감한 이는 학생들이었으니 힘들어하는 친구는 있어도 반발을 갖는 친구는 없었다. 하나 갑자기 오신 響 선생님은 수업 시간을 오로지 響 선생님의 설명으로만 채우셨다. 교과서를 전부 다루시기보다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쏙쏙 빼서 가르쳐 주셨고, 교과서에 있지 않은 작품도 알려 주셨다. 響 선생님 수업에선 내가 발표를 해야 된다는 피로감, 혹은 남들 발표를 들어야 한다는 지루함(* 성심껏 듣고 박수도 쳐 주었지만 발표가 하도 잦으니 다들 재미없어했다) 대신 문학 수업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직접 쓰고 홀로 외운 대본잘못 읊을 때면 화가 났지만, 響 선생님이 시키 단락내가 준비해 온 글이 아니었다. 칭놀람이 과했던 것도, 오독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어서였다. 響 생님은 찰나의 오독보다 전체의 낭독을 봐주셨다. 그해 1학기, 문학 과목은 <해야 돼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로 자리 잡았다. 복습할 때면 響 선생님의 칭찬이 떠올라 소리 내서 공부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학생부 전형으로 대학 간 사람으로서 주제넘은 모순 같다마는, 생활기록부의 무게가 왜 그리 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은 갖 요소를 챙기느라 예민해져 가고, 선생님들은 무조건 좋게 평가해야 되는 데 오만 활동 기재에 힘드시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3년 간의 고등학교 생활에서 가장 큰 의미를 차지 건 강당에서 치러진 어느 발표 대회다. 예선을 가진 후 정된 학생들끼리 강당에 올라 전교생과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하였다. 생활기록부 수상란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고작 몇 글자 수상 여부로 의미를 논하고 싶진 않다. 이 대회의 주제는 자율이었고, 내가 꼽은 주제는 <한국 문학>이었다. 한국 문학이 왜 세계 고전 반열에서 찾아보기 힘든지 분석하며, 현재 한국 문학의 위치와, 앞으로 위상을 드러낼 수 있는 방향에 대해 논하였다.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와 대학교까지, 학생으로서 수십 번 임한 발표 중 즐기면서 한 발표는 이때가 유일하다. 필참이 아니었던 만큼, 수상 욕심보다는 한 번 떠들어 보고 싶어서 나갔다. 원체 한국 소설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響 선생님 덕에 문학 과목을 원 없이 공부하여 한국 문학에 애정을 품게 된 것도 한몫했으리라. 響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의 빈자리를 정식으로 채우기보다는, 빈자리가 채워지기까지 수업을 맡아줄 대타로 오셨다. 그 때문 학교 졸업 앨범에도 실리지 않으셨으나 고등학교 시절, 내가 성장하 데 가장 크게 일조하신 분은 한 학기 하고도 몇 주 함께 한 響 선생님이라 생각한다. 그런 響 선생님께 '정식으로' 감사를 표할 기회가 없었다는 건 지금도 아쉽다. 響 선생님, 진정한 위인은 의도치 않은 변화를 끼친다고 합니다. 響 선생님의 자취에 영향을 받은 이는 저만이 아닐 겁니다. 이는 모든 선생님들의 공통점이기도 하지요.


요 근래 하늘을 쳐다볼 때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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