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ㅗ] 오독(誤讀) 동일한 부분을 한 번 더 볼 수 있는 기회 (娛讀의 '오'는 '즐길 오'이며 실제론 없는 단어입니다)
響 선생님. 선생님께선 지금 카메라를 들고 누비실지, 어느 학교의 인기쟁이가 되셨을지 궁금합니다. 저희 학교에 계실 때 보신 말똥한 눈빛들은 흔한 게 아니었습니다. 響 선생님이 가시고 나서는 수업 집중도가 나날이 깎여 가는 게 훤히 보였거든요. 물론 오시기 이전에도 그러하였으니 돌이켜 보면 이건 저희들의 문제였지요. 바람처럼 오셨다가 바람같이 사라지셨다기에는 후유증 또한 오래갔습니다. 響 선생님은 학교가 감사해야 하는 특별한 교사셨어요.
5학년인가 6학년 때는 20분은 걸어가야 하는 학원에 보내졌다. 거리는 상관 없었다. 걸어가는 방향이 중요했다. 우리 학교 근처면 좋을 것을, 다른 학교 부근이라 학원에서 나와 언니만 소속 학교가 달랐다. 학원 등록에 있어 언제고 우선시 되는 건 우리 언니라는 존재였다. 언니가 다니고 있거나 다닐 학원에 +1으로 보내졌고 나는 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엄마의 기대와 달리 친구를 금방 사귀는 언니는 날 챙겨주지 않았으니. 아무튼학원 선생님은 개념을 익힐 때면 번갈아 가며 낭독을 시키셨다. 어느 순간 친하지도 않은 학생들이 날 따라 하기 시작했다. 문장의 마지막 글자인 '-다'를 [다]라 발음하지 않고 [따]라 발음한다고 웃겨했다. 이러한 순간들이 해당 학원이 싫어진 1등 공신이었지만 의식한 덕에 잘못된 습관을 눈치챌 수 있었다.
미성년자 때 친구들과 있을 적엔, <혀 끝이 코에 닿는지> 여부가 종종 대화 주제로 올랐다. 더 나아가 <혀 끝이 콧구멍 안에 들어가는지> 단계에는 실패했지만 전 단계도 통과 못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내 혀가 긴 편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았다. 혀가 길면 발음이 좋다는 설(說)까지 주워들은 후로 낭독하는 순간이 덜 민망해졌다. 혀 길이 외에 '-다'를 [따] 말고 [다]로 고치며창피함이 한 스푼 덜어진 것도 있었다. 내가 봐도 "했따!"보다는 부드러움이 가미된 "했다~"가 훨 듣기 좋았다. 역시 뭐든 부끄러움을 겪어 봐야 늘 수 있다.
"이 문제는 1n번이 나와서 풀어 보자"보다 "그다음 단락은 1n번이 읽어 볼까?" 하는 지목이 나았을 뿐, 선생님들 입에서 내 학급 번호인 '1n번'이 나오자마자 심장은 마구마구 뛰었다. 숫기 없는 학생에게 느닷없는 지목만큼 원치 않은 일은 없었다. 전자의 경우는 정답이 정해져 있으니 맞히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 후자의 경우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한글만 알면 문제없으니 덜 절망스럽다가도 묘하게 더 부끄러웠다. 발표 시간도 아닌데 적막한 교실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면 선생님을 제외한 학급 친구들 귀를 다 닫아 버리고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18살, 문학 수업에서 어김없이 호명당했다. 쑥스러워하면서 낭독을 마치자 선생님(* 이하 響 선생님)이 감탄하셨다. "이야, 글을 굉장히 잘 읽는구나?" 급작스러운 주목에 열이 오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 처음 느껴 보는 색다른 기쁨이 마음을 요동시켰다. 響 선생님은 기존 문학 선생님이 급작스레 병가를 내시면서 오신 분이셨다. 선생님들의 발령에 관해선 손톱만큼도 몰랐지만, 響 선생님은 정식으로 오신 게 아니라 언제 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고 들었다. 響 선생님도 잠깐 머물다 떠날 사람이라는 걸 숨기지 않으셨다. 어느덧 여름 방학이 찾아왔고, "방학 끝나면 쌤도 안 계시려나?"라는 내 궁금증에 친구들은 "아무래도 그럴 거 같아"라며 호응하였다.
개학날 가장 궁금한 건 <문학 선생님>의 자리였다. 문학 시간이 되자 익숙한 얼굴의 響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들어오셨다. 안심한 것도 잠시, 響 선생님은 중간고사를 대비하기도 전에 가셨다. 그쯤 학교 측에서 '정식' 선생님을 찾은 모양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학기 전후로, 강당에서 인사받으며 떠나시는 게 아니고, 하루아침에 가시는 게 떨떠름하게 다가왔다. 당시 내 눈에는 학교가 響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 속상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교가 고등학교보다 덜 힘들었다. 대학생은 각자도생의 성향이 강해 스펙도 알아서 쌓으면 그만이지만 고등학생의 스펙은 '학생부'라는 문서에 깡그리 모여졌다. 출결과 성적 관리를 비롯해 온갖 수행평가와 창체(* 창의적 체험활동)에 시간을 쏟으면서, 수상 이력을 위한 교내 행사도 챙겨야 했다. 나는 이 같은 열기에비껴 나오고 싶었지만 봉사라면 몰라도 위의 것들은 선택보다는 필참으로 이루어졌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지목당하는 건 부끄러웠으나 교탁에 서서 친구들 보고 말하는 건 아무렇지 않을 만큼 발표는 일상이 되어갔다. "안녕하세요, 1n번 땡칠칠입니다"로 시작해서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대본을 양산하던 시기였다. 그런 까닭에 響 선생님께서 무심코 던지신 말은 곱씹을 만했다. "발표를 잘하는구나" "PPT를 잘 만드는구나" 같은 말 외에 "글을 잘 읽는구나"라는 칭찬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다른 과목들은 매 수업 시간이면 한 두 명 혹은 한 모둠씩 발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생활기록부에 가장 민감한 이는 학생들이었으니 힘들어하는 친구는 있어도 반발을 갖는 친구는 없었다. 하나 갑자기 오신 響 선생님은 수업 시간을 오로지 響 선생님의 설명으로만 채우셨다. 교과서를 전부 다루시기보다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쏙쏙 빼서 가르쳐 주셨고, 교과서에 있지 않은 작품도 알려 주셨다. 響 선생님 수업에선 내가 발표를 해야 된다는 피로감, 혹은 남들 발표를 들어야 한다는 지루함(* 성심껏 듣고 박수도 쳐 주었지만 발표가 하도 잦으니 다들 재미없어했다) 대신 문학 수업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직접 쓰고 홀로 외운 대본을 잘못 읊을 때면 화가 났지만, 響 선생님이 시키신 단락은 내가 준비해 온 글이 아니었다. 칭찬에 놀람이 과했던 것도, 오독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어서였다. 響 선생님은 찰나의 오독보다 전체의 낭독을 봐주셨다. 그해 1학기, 문학 과목은 <해야 돼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로 자리 잡았다. 복습할 때면 響 선생님의 칭찬이 떠올라 소리 내서 공부하느라고 시간이 더 걸렸다.
학생부 전형으로 대학 간 사람으로서 주제넘은 모순 같다마는, 생활기록부의 무게가 왜 그리 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학생들은온갖 요소를 챙기느라 예민해져 가고, 선생님들은무조건좋게 평가해야 되는 데다 오만 활동기재에 힘드시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3년 간의 고등학교 생활에서 가장 큰 의미를 차지한 건 강당에서 치러진 어느 발표 대회다. 예선을 가진 후 선정된 학생들끼리 강당에 올라전교생과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하였다. 생활기록부 수상란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고작 몇 글자인 수상 여부로 의미를 논하고 싶진 않다. 이 대회의 주제는 자율이었고, 내가 꼽은 주제는 <한국 문학>이었다. 한국 문학이 왜 세계 고전 반열에서 찾아보기 힘든지 분석하며, 현재 한국 문학의 위치와, 앞으로 위상을 드러낼 수 있는 방향에 대해 논하였다.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와 대학교까지, 학생으로서 수십 번 임한 발표 중 즐기면서 한 발표는 이때가 유일하다. 필참이 아니었던 만큼, 수상 욕심보다는 한 번 떠들어 보고 싶어서 나갔다. 원체 한국 소설을 좋아하기도 했지만響 선생님 덕에 문학 과목을 원 없이 공부하여 한국 문학에 애정을 품게 된 것도 한몫했으리라. 響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의 빈자리를 정식으로 채우기보다는, 빈자리가 채워지기까지 수업을 맡아줄 대타로 오셨다. 그 때문에 학교 졸업 앨범에도 실리지 않으셨으나 고등학교 시절, 내가성장하는 데 가장 크게 일조하신 분은 한 학기 하고도 몇 주 함께 한 響 선생님이라 생각한다. 그런 響 선생님께 '정식으로' 감사를 표할 기회가 없었다는 건 지금도 아쉽다. 響 선생님, 진정한 위인은 의도치 않은 변화를 끼친다고 합니다. 響 선생님의 자취에 영향을 받은 이는 저만이 아닐 겁니다. 이는 모든 선생님들의 공통점이기도 하겠지요.